문 앞에 '누구나 환영'이라 적혀 있었지만, 그 문엔 계단 세 칸이 있었습니다
동네에 가게가 하나 새로 생겼습니다. 유리문에 ‘누구나 환영합니다’라고 큼지막하게 적혀 있죠. 보기만 해도 마음이 조금 따뜻해지는 문구입니다. 그런데 그 문 바로 앞에는 계단이 세 칸 놓여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 앞까지 다가왔다가, 휠체어로는 도무지 올라설 수가 없어 잠깐 멈춰 서고, 결국 조용히 방향을 돌립니다. 혹시 이런 가게 앞을 무심코 지나치신 적, 한 번쯤 있으신가요?
꼭 그 가게만의 일은 아닙니다. ‘모두 오세요’라고 적힌 동네 행사 안내문 아래로 가파른 돌계단이 이어질 때, ‘누구나 이용 가능’이라 쓰인 시설인데 정작 화장실 문이 휠체어가 들어갈 만큼 넓지 않을 때, 혹은 ‘전 연령 환영’이라면서 유아차를 끌고는 도저히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좁은 입구일 때 — 우리는 비슷한 장면을 마주합니다. 환영한다는 말은 분명 거기 있는데, 정작 그 말 안으로 걸어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 문밖에 남겨지는 장면이요.
‘들어와도 된다’와 ‘들어갈 수 있다’ 사이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누구나 환영합니다’라는 문장은 분명 친절합니다. 누구도 막지 않겠다는 선언이니까요. 가게 주인이 누군가를 일부러 밀어내려고 그 계단을 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여기엔 탓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문밖에 남겨지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 어긋남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요.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이 자리를 들여다볼 한 가지 시선을 건넵니다. 그는 묻습니다 — 권리가 종이에 적혀 있는 것과, 그 권리를 실제로 펼칠 수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고요. ‘들어와도 된다’는 허락이 아무리 너그러워도, 그 사람이 실제로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 있지 않다면, 그 허락은 그 사람에게 닿지 못한 채 허공에 떠 있게 됩니다. 그가 보는 존엄은 바로 그 ‘실제로 할 수 있음’의 자리에 있습니다. 무엇을 해도 된다고 말해 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자기 삶을 정말로 펼칠 수 있는 자유가 마련되어 있느냐에 있다는 시선이죠.
그래서 이건 누군가가 유독 무심해서 벌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더 깊은 곳을 보면, 그 공간을 처음 설계할 때 ‘계단을 오를 수 없는 몸’이 애초에 고려 대상 안에 들어 있지 않았던 거예요. 문턱을 어떻게 만들지, 간판을 어디에 달지는 빼곡히 정해졌는데, ‘이 문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칸만은 처음부터 비어 있었던 겁니다. 환영의 마음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 마음이 닿을 길 자체가 설계도에 그려지지 않았던 거죠. 그렇게 보면, ‘누구나 환영’이라는 말 안에 끝내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환영이 아니라 환영의 모양을 한 닫힘일지도 모릅니다.
같은 시선이 닿는 자리들
이 시선으로 보기 시작하면, 비슷한 빈칸이 하루 곳곳에 스며 있다는 게 눈에 들어옵니다. 회사에서 ‘누구나 자유롭게 의견 주세요’라고 열어 둔 회의가 그렇습니다. 말은 분명 열려 있는데, 막내가 부장 앞에서 다른 의견을 실제로 꺼낼 수 있는 조건은 그 자리에 마련되어 있지 않곤 하죠. 발언할 권리는 선언되어 있지만, 그 권리를 펼칠 자유는 텅 비어 있는 겁니다.
학교에서 ‘질문 있는 사람 손 들어요’라고 했을 때 끝내 손을 들지 못하는 아이, ‘누구나 신청 가능’이라지만 복잡한 온라인 양식 앞에서 화면을 닫아 버리는 어르신, ‘편하게 말씀하세요’라는 진료실에서 정작 자기 증상을 또렷이 설명할 틈을 얻지 못한 환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해도 된다’는 문은 열려 있는데, 정작 ‘실제로 할 수 있는’ 조건이 빠져 있는 자리들이죠. 그리고 가끔은 제가 그 문 앞에서 돌아선 쪽이었고, 가끔은 ‘열어 뒀으니 됐다’며 정작 누군가가 들어올 수 있는지는 살피지 않은 쪽이었다는 것도 함께 보입니다.
이 시선을 더 들여다보고 싶다면
이 시선을 차분히 펼쳐 둔 책이 마사 누스바움의 『역량의 창조』(2011)입니다. 저자는 한 사람의 삶이 좋은지를 그가 가진 소득이나 자원의 ‘양’으로 보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묻죠 —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아무리 좋은 제도가 종이 위에 적혀 있어도, 정작 그 사람이 그것을 자기 삶에서 펼칠 수 없다면 그건 빈 약속일 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책은 누구를 탓하라고 부추기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열어 뒀다’, ‘권리가 있다’는 말로 너무 쉽게 안심하고 마는 지점을 가만히 짚어 줍니다. 오늘 그 가게처럼, ‘열려 있다’는 선언과 ‘실제로 들어갈 수 있다’는 자유 사이에 벌어진 틈을 천천히 따라가 보고 싶을 때 곁에 두기 좋은 책입니다.
저도 어제까진, 그 ‘누구나 환영’이라는 문구를 그냥 따뜻한 인사말로만 봤습니다. 그 앞의 계단 세 칸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요. 그런데 이렇게 한번 다시 보기 시작하니까, 그 세 칸이 누군가에게는 문이 아니라 벽이었다는 게 보이더라고요. 환영의 말과, 실제로 그 안에 들어설 수 있는 자유가 늘 같은 자리에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 무심코 지나친 ‘열려 있다’는 말 하나를 잠깐 낯설게 다시 봐주세요. 누구나 환영한다던 그 문이, 정말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는지를요. 어쩌면 그 문 앞에 조용히 멈춰 섰던 누군가를 한 번 떠올려 보는 일이, 환영을 정말 환영으로 만드는 가장 작은 첫걸음일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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