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건만 남기고 지나간 자리에서
경비실 앞을 지나는 길이었습니다. 누군가 안쪽을 향해 한마디를 툭 던집니다. “아저씨,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대답을 기다리는 말투가 아니었어요. 그냥 시키고, 돌아서고, 가 버리는 말이었죠. 그 짧은 순간 경비 아저씨가 어떤 표정이었는지는 아무도 보지 않았습니다. 혹시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 아니신가요. 비슷한 장면은 의외로 가까이 있습니다. 카페에서 직원의 얼굴은 한 번도 보지 않고 메뉴판만 보며 주문하던 순간, 콜센터 상담원에게 인사도 없이 용건부터 쏟아 내던 어느 통화, 문 앞까지 와 준 기사님께 인터폰으로 “거기 두고 가세요” 한마디만 던지던 우리들. 누가 못된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잠깐 멈춰 보면, 그 장면들엔 묘하게 닮은 데가 있어요. 대답을 들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던 걸까요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우리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나와 너’예요. 마주 앉아, 상대를 나처럼 속이 있는 한 사람으로 만나는 관계죠. 다른 하나는 ‘나와 그것’입니다. 상대를 내 용건을 처리해 줄 무언가로, 하나의 기능으로 두는 태도고요.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는 말을 이 눈으로 다시 보면 조금 서늘해집니다. 그 말 안에는 사실,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왜 그렇게 알아들었는지는 처음부터 궁금하지 않았다는 게 들어 있거든요. 알아들어야 할 상대가 아니라, 시키면 움직이면 되는 쪽으로 본 거예요. 그러니까 ‘못 알아듣는 사람’이 문제였던 게 아니라, 애초에 그를 ‘너’로 마주할 마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는 게 보입니다. 여기서 짚고 싶은 건 누구를 욕하자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말을 던진 사람도 아마 바빴을 테고, 하루치의 피로가 있었을 겁니다. 문제는 사람의 못됨이라기보다, 어떤 자리들은 애초에 ‘마주 봄’이 빠진 채로 설계되어 있다는 데 있어요. 경비실, 창구, 콜센터, 배달 — 그 자리에 선 사람을 ‘용건의 통로’로만 보도록 동선과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