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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June, 2026

용건만 남기고 지나간 자리에서

경비실 앞을 지나는 길이었습니다. 누군가 안쪽을 향해 한마디를 툭 던집니다. “아저씨,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대답을 기다리는 말투가 아니었어요. 그냥 시키고, 돌아서고, 가 버리는 말이었죠. 그 짧은 순간 경비 아저씨가 어떤 표정이었는지는 아무도 보지 않았습니다. 혹시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 아니신가요. 비슷한 장면은 의외로 가까이 있습니다. 카페에서 직원의 얼굴은 한 번도 보지 않고 메뉴판만 보며 주문하던 순간, 콜센터 상담원에게 인사도 없이 용건부터 쏟아 내던 어느 통화, 문 앞까지 와 준 기사님께 인터폰으로 “거기 두고 가세요” 한마디만 던지던 우리들. 누가 못된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잠깐 멈춰 보면, 그 장면들엔 묘하게 닮은 데가 있어요. 대답을 들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던 걸까요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우리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나와 너’예요. 마주 앉아, 상대를 나처럼 속이 있는 한 사람으로 만나는 관계죠. 다른 하나는 ‘나와 그것’입니다. 상대를 내 용건을 처리해 줄 무언가로, 하나의 기능으로 두는 태도고요.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는 말을 이 눈으로 다시 보면 조금 서늘해집니다. 그 말 안에는 사실,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왜 그렇게 알아들었는지는 처음부터 궁금하지 않았다는 게 들어 있거든요. 알아들어야 할 상대가 아니라, 시키면 움직이면 되는 쪽으로 본 거예요. 그러니까 ‘못 알아듣는 사람’이 문제였던 게 아니라, 애초에 그를 ‘너’로 마주할 마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는 게 보입니다. 여기서 짚고 싶은 건 누구를 욕하자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말을 던진 사람도 아마 바빴을 테고, 하루치의 피로가 있었을 겁니다. 문제는 사람의 못됨이라기보다, 어떤 자리들은 애초에 ‘마주 봄’이 빠진 채로 설계되어 있다는 데 있어요. 경비실, 창구, 콜센터, 배달 — 그 자리에 선 사람을 ‘용건의 통로’로만 보도록 동선과 말...

왔다 간 한 사람을 받아 줄 칸

면접을 봤습니다. 정장을 꺼내 다리고, 예상 질문마다 답을 적어 외우고, 떨리는 마음으로 한 시간 남짓 마주 앉아 제가 할 수 있는 말을 다 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며칠이 지나고, 다시 한 주가 지나도록 — 합격인지 불합격인지, 연락이 한 통도 오지 않습니다. 처음엔 ‘아직 정리 중인가 보다’ 하다가, 점점 ‘아, 떨어졌나 보다’ 하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게 됩니다. 혹시 이 기다림, 어디선가 겪어 보신 적 있으신가요. 꼭 면접만의 일은 아닐 겁니다. 정성껏 써 보낸 메일에 끝내 답이 없을 때, 며칠 밤을 들여 올린 제안서가 ‘검토하겠다’는 말 뒤로 그대로 사라질 때, 용기 내어 건넨 안부에 아무 응답이 돌아오지 않을 때. 누가 모질게 군 것도, 대놓고 거절한 것도 아닌데, 그 자리를 지나온 사람만 어쩐지 조금 작아져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상합니다. 우리는 보통 ‘떨어져서 속상하다’고 여기는데, 정작 마음에 오래 남는 건 결과 그 자체가 아닌 것 같거든요.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떨어진 게 정말 그렇게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까요. 사실 ‘불합격입니다’라는 한 줄이라도 왔다면, 서운하긴 해도 마음은 어딘가에 가서 닿습니다. 진짜 허전했던 건 떨어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내가 거기 왔다 갔다는 일 자체가 아무 데도 가닿지 않고 그냥 흩어졌다는 것 — ‘아무 응답도 없었다’는 쪽일지도 모릅니다. 빠져 있던 건 결과가 아니라 응답이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사람이 사람으로 서는 일을 ‘인정’이라는 말로 풀어냈습니다. 어렵게 들리지만 뜻은 단순해요. 내가 한 일과 나라는 존재가, 누군가에게 ‘응답’이 되어 되돌아올 때 — 그제야 사람은 비로소 자기가 한 사람으로 선다는 겁니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무얼 하든 그게 아무에게도 가닿지 않고 흩어지기만 한다면, 사람은 조금씩 자기 자리를 잃어 갑니다. 응답이 없다는 건 단순히 정보가 안 온 게 아니라, ‘당신이 여기 있었다’는 사...

다 할 줄 아는데, 할 곳이 없을 때

어느 창구 앞입니다. 한 분이 수어로 용건을 차근차근, 빠짐없이 설명합니다.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서류가 빠졌는지, 언제까지 처리되어야 하는지 — 손끝으로 또렷하게 다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돌아온 답은 짧은 한 줄이었습니다. “죄송하지만, 글로 적어서 다시 오세요.” 혹시 이런 장면, 어디선가 보신 적 있으신가요. 비슷한 장면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습니다. 계단 앞에서 멈춰 선 휠체어, “여기는 전화로만 접수받습니다”라는 안내문 앞에서 발길을 돌리는, 말보다 글이 편한 분. 다 할 줄 아는 사람이 정작 ‘할 곳’이 없어 돌아서는 장면이요. 잠깐 멈춰 보면 어딘가 이상합니다. 그분은 분명 자기 용건을 누구보다 정확히 말했는데, 어째서 ‘다시 오라’는 말을 들어야 했을까요. 막힌 건 사람이었을까요, 창구였을까요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창구 앞의 그분은 ‘소통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수어로는 누구보다 분명하게 다 말할 수 있었으니까요. 막힌 건 그분의 능력이 아니라, 그 말을 받아 줄 창구가 거기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능력은 그분 안에 또렷이 있었는데, 그걸 펼칠 길이 바깥에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거죠.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이런 장면을 ‘역량’이라는 눈으로 봅니다. 조금 풀어 말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능력이 정말 그 사람의 것이 되려면, 그 능력이 사람 안에 들어 있는 것만으로는 모자랍니다. 그걸 실제로 펼칠 수 있게 해 주는 바깥 조건 — 길, 통로, 받아 줄 자리 — 까지 함께 갖춰져야 비로소 그 능력은 ‘쓸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헤엄칠 줄 아는 사람도 물이 없으면 헤엄칠 수 없는 것처럼요. 이 시선으로 보면, 존엄이라는 것도 ‘할 줄 아느냐’가 아니라 ‘할 수 있게 길이 열려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게 보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못 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건, 그 사람의 부족이라기보다 그를 받을 칸이 빠진 설계일 때가 많아요. 창구의 직원이 못된 사람이라서가 아닙니다. 그분도 규정대로 정성껏 응대했...

밥 한 끼와, 그 사람이 그냥 한 사람으로 있을 자리

점심시간입니다. 급식 줄은 평소처럼 길고, 앞뒤로 친구들이 저마다 떠들고 있습니다. 제 차례가 되어 카드를 내미는 순간, 카운터 너머에서 '아, 이건 무료 대상이지' 하고 확인하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크게 외친 것도, 누구를 나무란 것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 한마디는 바로 뒤에 선 친구에게도, 그 뒤의 친구에게도 닿을 만큼이었습니다. 별다른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식판을 받아 자리로 가 밥을 먹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줄을 빠져나오는 동안 어깨가 한 뼘쯤 내려가 있습니다. 혹시 어디선가 비슷한 순간을 지나오신 적 있으신가요. 꼭 급식실만의 일은 아닐 겁니다. 관공서 창구에서 지원받는 사정을 옆 사람도 다 듣게 소리 내어 확인받을 때, 은행에서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를 줄 선 사람들 앞에서 말해야 할 때. 누가 거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그 자리를 지나온 사람만 어쩐지 걸음이 작아집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여러 사람 앞에서 제 처지를 한 번 해명하고 나온 기분이 드는 거죠.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먼저 분명히 해 둘 게 있습니다. 그 한마디를 한 분이 모진 마음이었던 건 아닙니다. 정해진 절차대로 성실히 확인했을 뿐이죠. 그러니 제가 느낀 그 작아짐은, 확인했다는 사실에서 온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서 온 걸까요. 가려낼 칸은 있는데, 조용히 건넬 칸은 없었던 것 다시 보게 되는 건 사람이 아니라 그 절차 쪽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누가 도움을 받는 대상인지 '가려내는' 칸은 또박또박 마련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남들 모르게 조용히 건네는' 칸은 어디에도 설계돼 있지 않아요. 한 발만 비켜선 자리, 한마디만 낮춘 목소리, 카드 한 장으로 끝낼 수 있는 절차—그 작은 칸 하나가 처음부터 비어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그 줄에서 누군가를 작아지게 한 건 어느 한 사람의 무례가 아니라, 그 자리의 설계에 처음부터 그 칸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던 거죠. 정치철...

‘네 일처럼’이라는 말이 청한 것, 그리고 청하지 않은 것

“우리 회사를 네 일처럼 생각하고 일해 줘.” 일을 하며 한 번쯤은 들어 보셨을 겁니다. 처음 들을 땐 어딘가 뭉클하기까지 한 말이에요. 나를 한낱 일손으로 보지 않고, 이 일의 주인으로 대접해 주는 것 같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정말로 마음을 냅니다. 퇴근길에도 일이 눈에 밟히고, 쉬는 날에도 더 나은 방법이 떠오르면 메모를 해 두고요. 그런데 막상 무언가를 정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돌아오는 답은 늘 한결같습니다. “그건 위에서 정해.” 방향을 정하는 일도, 예산을 쓰는 일도, 일하는 방식 하나를 바꾸는 일도, 어느 것 하나 제 몫으로 떨어지지 않아요. 마음은 주인만큼 내라고 하면서, 정작 정할 자리는 한 칸도 비어 있지 않은 겁니다. 혹시, 익숙한 장면 아니신가요. 비단 회사만의 일도 아닙니다. 모임에서 “네가 좀 주인의식을 갖고 끌어 봐” 하는 부탁을 받았는데, 정작 날짜 하나, 장소 하나 제 뜻대로 정할 수 없었던 자리. 거기서도 같은 어긋남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마음을 청하는 말과, 자리를 내주는 말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주인처럼 일하라’는 말은 분명 사람을 귀하게 대하는 다정한 말처럼 들립니다. 누구도 나를 함부로 부리려고 그 말을 꺼낸 게 아니에요. 다만 그 말이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만히 들여다보면, 묘한 빈틈이 드러납니다. 청해진 건 ‘주인의 마음’일 뿐, ‘주인의 권한’은 아니었던 거죠. 마음을 내라는 말과 자리를 내준다는 말은, 닮은 듯 보여도 사실 전혀 다른 말이었던 겁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오래전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을 한낱 수단으로만 다루지 말고, 늘 목적으로도 대하라고요. 어렵게 들리지만 뜻은 단순합니다. 사람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도구이기 전에,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존재라는 거예요. 이 시선으로 ‘네 일처럼’이라는 말을 다시 보면, 어긋난 지점이 또렷해집니다. 마음은 주인만큼 쏟으라면서 정할 자리는 내주지 않을 때, 그 사람은 ‘함께 정하는 목적’이 아니...

짐은 제가 들었는데, 인사는 옆 사람에게 갔습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해 본 적 다들 한 번쯤 있으실 겁니다. 어느 날 저는 어르신께 자리를 내어 드리고, 손에 든 짐이 무거워 보여 그것까지 받아 머리 위 선반에 올려 드렸습니다. 별일도 아니고, 그저 손이 먼저 나갔을 뿐이죠. 그런데 어르신께서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건네신 곳은 제가 아니라, 제 옆에 가만히 서 있던 다른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살짝 당황한 얼굴로 “아, 저는 아닌데요” 하셨고, 저는 괜히 멋쩍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고요. 혹시, 비슷한 순간을 겪어 보신 적 있으신가요. 꼭 버스 안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엘리베이터 문을 잡아 드렸는데 인사는 뒤에 선 사람에게 가는 아침이 있고, 길에서 누군가 떨어뜨린 물건을 주워 건넸는데 고맙다는 말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저녁이 있어요. 한 일은 분명 제 손에서 나왔는데, 그 일에 대한 인사는 자꾸 다른 사람 앞에 가서 멈춥니다. 큰 서운함이랄 것도 없습니다. 그냥 ‘뭐, 인사 한 번 길을 잘못 든 거지’ 하고 넘어가면 그만인 작은 일이죠. 그런데 저는 그 작은 어긋남이 왜 자꾸 반복되는지, 한번 천천히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그 인사는 왜 길을 잘못 들었을까요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보통 우리는 인사가 빗나간 건 받은 사람이 잠깐 무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사람은 혼자 힘으로 ‘나는 이런 사람이다’를 정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봐 주는 그 관계 안에서 비로소 자기 모습을 갖춰 간다고 말합니다. 누군가의 시선에 ‘내가 한 일을 한 사람’으로 비칠 때, 그제야 나는 그 자리에 존재하게 된다는 뜻이에요. 알아봐 주는 눈이 없으면, 한 일은 있어도 그 일을 한 사람은 어쩐지 흐릿해집니다. 그렇게 보면 버스에서의 그 짧은 순간이 조금 다르게 다가옵니다. 어르신을 탓할 일이 아니에요. 낯선 사람들이 빽빽이 선 공간에서, 우리는 장면을 아주 빠르게 훑습니다. 그 빠른 눈은 ‘방금 누가 무엇을 했는가’를 일일이 ...

‘됐어, 내가 할게’라는 다정함이 가만히 가져간 것

큰 병이나 수술 끝에 회복기를 보내 본 적, 혹은 곁에서 그런 사람을 돌봐 본 적, 다들 한 번쯤 있으실 겁니다. 몸은 아직 굼뜨지만 머리는 멀쩡하고, 가만히 누워만 있자니 좀이 쑤셔서 작은 일 하나라도 거들어 보려 슬며시 일어나 봅니다. 그릇 하나를 옮기려 하거나, 떨어진 물건을 주워 보려 하거나요. 그러면 어김없이 사방에서 손사래가 날아옵니다. “됐어, 가만히 있어. 그냥 쉬어.” 더없이 다정한 말이죠. 누구도 저를 미워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혹시 이런 ‘가만히 계세요’를, 들어 보신 적 있으신가요. 꼭 병상만의 일도 아닙니다. 연세 드신 부모님이 “내가 설거지 좀 할게” 하고 일어서면 “놔두세요, 제가 할게요” 하며 그릇을 도로 가져오는 저녁이 있고, 다친 친구가 “이 정도는 내가 들 수 있어” 하는데도 굳이 받아 드는 길목이 있습니다. 하나같이 따뜻한 마음에서 나온 손길이에요. 그런데 그 따뜻한 손길 끝에서, 정작 그 사람이 ‘직접 해 보려던 무언가’는 조용히 사라집니다. 그게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은 채로요. 잘 보살핌받는 것과, 스스로 해내는 것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저를 말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정합니다. 나쁜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은 바로 이런 자리에서 두 가지를 가만히 나눠 봅니다. 누군가를 ‘잘 보살피는 것’과, 그 사람이 ‘스스로 무언가를 해내도록 두는 것’은 결코 같은 일이 아니라고요. 앞엣것은 좋은 결과를 손에 쥐여 주는 일이고, 뒤엣것은 자기 삶을 자기 손으로 움직이는 자유 — 아직 할 수 있는 일을 실제로 펼쳐 보는 자유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누군가를 돌볼 때 그 마음은 거의 다 앞엣것으로만 향해 있습니다. 잘 먹게 하고, 잘 쉬게 하고, 불편함을 덜어 주는 쪽으로요. 좋은 결과를 쥐여 주려는 마음이죠. 그런데 그 다정한 설계 어디에도, ‘이 사람이 아직 할 수 있는 몫’을 위한 칸은 좀처럼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돌봄은 ‘해 줄 일’ 목록으로만 ...

벽에 걸린 명단 — 거기 적힌 게, 정말 숫자뿐이었을까요

엘리베이터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습니다. '관리비 미납 세대'라는 굵은 제목 아래로, 호수들이 줄을 맞춰 적혀 있고요. 사람들은 그 앞에서 잠깐 멈춰 번호를 훑어보고, 문이 열리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내립니다. 종이는 그저 정보일 뿐이고, 누구를 다치게 하려고 붙인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 그 명단에서 익숙한 번호를 발견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이 엘리베이터는 그날부터 조금 다른 공간이 됩니다. 혹시 비슷한 장면을 지나오신 적 있으신가요. 꼭 아파트만의 일은 아닙니다. 작은 식당 계산대 옆에 외상 장부 대신 적어 둔 이름들, 아이가 받아 온 알림장에 준비물 안 챙긴 학생 번호가 나란히 적혀 있던 칸, 단체 대화방에 '아직 회비 안 내신 분'이라며 올라온 명단. 누가 큰소리를 낸 것도, 모진 말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 목록에 자기 이름이 있는 사람만, 어쩐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집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먼저 분명히 해 둘 것이 있습니다. 관리비를 제때 걷는 일은 마땅하고, 그 명단을 붙인 분도 맡은 일을 성실히 했을 뿐입니다. 누구도 누군가에게 망신을 주려던 게 아니에요. 그러니 그 종이 앞에서 누군가가 작아졌다면, 그건 일을 처리했다는 사실에서 온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서 온 걸까요. 같은 일을, 모두가 보는 벽에 거는 것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존중'이라는 말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입니다. 그가 말하는 존중은 좀 뜻밖이에요. 누군가를 칭찬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이 아니라, 형편이 서로 다른 사회에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도 끝까지 사람으로 대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돈이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말이죠. 그리고 세넷이 보기에, 같은 일도 사람을 선 채로 둘 수 있고 어느새 작아지게 만들 수도 있는데, 그 둘을 가르는 건 일을 하는 사람의 마음씨가 아닙니다. 애초에 그 일을 '어디서, 누구 보는 데서' 하도록 짜 ...

‘다음 번호요’ 그 한마디 — 그때 사라진 건, 정말 제 이름뿐이었을까요

주민센터나 은행, 병원 수납 창구에 앉아 차례를 기다려 본 적, 다들 한 번쯤 있으실 겁니다. 손에는 뽑아 든 번호표 한 장, 머리 위 전광판에는 숫자가 한 칸씩 올라가고, 마음은 어느새 그 숫자에 맞춰 조용히 뜁니다. 드디어 제 차례. 그런데 그 순간 건너오는 건 제 이름이 아니라 “다음 번호요”, 혹은 “47번 고객님” 한마디입니다. 잠깐 멈칫하지만, 곧 자리에서 일어나 창구로 향합니다. 혹시, 익숙한 장면 아니신가요. 꼭 창구 앞만의 일도 아닙니다. 콜센터에 전화를 걸어 한참을 기다린 끝에 “고객님, 상담원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하는 음성을 들을 때, 큰 병원 진료실에서 “다음 환자분 들어오세요” 소리에 맞춰 일어설 때, 우리는 닮은 자리를 지납니다. 이름이 분명히 있는데도, 그 자리에서는 잠깐 ‘처리되어야 할 한 건’으로 줄을 서게 되는 장면이요.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반대편 창구에 앉아 “다음 분” 하고 손짓을 보낸 쪽이 저였던 날도 분명 있었습니다. ‘너’로 만나느냐, ‘그것’으로 넘기느냐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가만히 둘로 나눠 봅니다. 하나는 마주 서서 ‘너’로 만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처리해야 할 ‘그것’으로 다루는 방식입니다. 말은 어렵게 들리지만, 가만히 보면 우리 누구나 아는 차이예요. 앞에 선 사람을 한 사람으로 마주하느냐, 아니면 빨리 넘겨야 할 한 건의 일감으로 보느냐. 같은 사람을 두고도 그 둘은 완전히 다른 자리에 서 있습니다. 번호로 불리는 그 짧은 순간, 저는 마주해야 할 ‘너’가 아니라 빠르게 지나가야 할 ‘한 건’이 됩니다. 이름이 있는데도 이름이 필요 없어지는 자리예요. 그런데 부버의 시선이 매서운 건 여기서부터입니다. 이 일이 창구 직원이 차갑거나 무례해서 벌어지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분도 하루에 수십, 수백 명을 마주합니다. 정말 비어 있는 건 그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그 창구의 ‘설계’예요. 그 구조 어디에도 ‘한 사람을 잠...

곁을 지킨 이름은, 어느 칸에 적히나요

병실에 오래 머물러 본 분들은 아실 겁니다. '보호자'라는 자리는 서류 한 줄로는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다는 걸요. 몇 달째 한 사람의 곁을 지키며 씻기고, 끼니를 떠먹이고, 새벽마다 깨어 숨소리를 듣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수속을 밟다가, 서류의 '보호자' 칸에 적힌 이름을 보고 잠깐 멈칫합니다. 거기엔 정작 그 곁을 지킨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이름이 단정하게 적혀 있었거든요. 이상한 건, 그 순간 크게 화가 나기보다 어쩐지 풍경이 낯설어진다는 점입니다. 내가 한 일은 분명 거기 있는데, 그 일을 한 사람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는 풍경. 우선은 이 장면을, 옳고 그름을 서둘러 따지지 말고 그냥 한 번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혹시, 어딘가 익숙하지 않으신가요. 잠깐, 이 장면을 다르게 봐볼게요 간병이라는 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건 결국 누군가를 끝까지 '한 사람'으로 알아보는 일입니다. 환자라는 이름 아래 뭉뚱그려지기 쉬운 사람을, 어제는 무얼 좋아했고 오늘은 어디가 더 아픈지 매일 새로 알아봐 주는 일이니까요. 곁을 지킨다는 건 그렇게 한 사람의 하루를 두 손으로 붙드는 일입니다. 철학자 헤겔은 사람이 어떻게 비로소 한 사람이 되는지를 오래 들여다본 이입니다. 그의 생각을 아주 평이하게 옮기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한 사람으로 알아보고, 또 그 사람에게서 나 역시 한 사람으로 알아봐질 때, 비로소 나는 내가 됩니다. 그는 이 주고받음을 '서로 알아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여기엔 함정이 하나 있습니다. 알아봄이 한쪽으로만 흐를 때입니다. 가장 많이 내주고 가장 깊이 곁을 지킨 사람이, 정작 자신은 아무에게도 알아봐지지 못한 채 남는 경우요. 오늘 그 '보호자' 칸이 꼭 그렇습니다. 가장 깊이 한 사람을 알아본 이가, 서류 위에서는 끝내 알아봐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는 짚고 싶습니다. 이건 그 칸에 이름을...

키오스크 앞의 몇 초 — 거기 있는 기계가, ‘할 수 있음’까지 건넨 건 아니었습니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면, 요즘은 사람보다 먼저 키오스크가 우리를 맞습니다. 화면을 한 번 더 들여다보려고 잠깐 멈춰 섭니다. 어떤 메뉴를 어디서 눌러야 하는지, 옵션은 또 무엇인지 — 한 박자 천천히 살피고 싶을 뿐인데, 그 한 박자가 채 지나기도 전에 뒤에서 “밀려요” 하는 소리가 먼저 건너옵니다. 손끝이 급해지고, 마음은 더 급해집니다. 혹시 그 앞에서 괜히 작아져 본 적, 한 번쯤 있으실까요. 꼭 식당만의 일은 아닙니다. 병원 무인 접수기 앞에서 화면이 자꾸 다음으로 넘어갈 때, 은행 ATM 앞에서 어디를 눌러야 할지 몰라 한참을 들여다볼 때, 버스 단말기에 카드를 갖다 대는 그 짧은 순간조차 누군가의 한숨이 등 뒤로 느껴질 때 — 우리는 닮은 장면을 마주합니다. 기계는 분명 ‘누구나 쓰라고’ 거기 놓여 있는데, 정작 그 앞에 선 사람은 점점 더 쪼그라드는 장면이요.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 한숨을 등 뒤에서 보낸 쪽이 저였던 날도 분명 있었습니다. ‘거기 있다’와 ‘내가 쓸 수 있다’ 사이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그 키오스크는 누구든 와서 쓸 수 있도록, 분명 거기 열려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있다’는 것과 ‘내가 그것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가만히 따져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기계가 놓여 있다는 사실과, 그 앞에서 정말 천천히 주문을 마칠 수 있느냐 사이에는, 생각보다 먼 거리가 있어요.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존엄을 ‘무엇이 주어져 있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펼칠 자유가 있느냐’에서 찾았습니다. 기회가 형식적으로 열려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거예요. 그것을 정말로 해낼 수 있는 여건과 여유까지 함께 갖춰질 때, 비로소 ‘할 수 있음’이 한 사람에게 가서 닿는다는 겁니다. 이 시선으로 보면, 키오스크 앞의 그 몇 초는 한 사람의 ‘느림’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 박자 천천히 눌러도 괜찮은 여유가 그 자리에서 통째로 빠져 있었던 것이죠.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등 뒤에서 재촉한 사람이...

모두가 친절했는데, 왜 한 사람은 작아졌을까요

병원 진료실 안, 의사 선생님과 마주 앉아 검사 결과를 듣던 순간을 떠올려 보신 적 있으신가요.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고 손바닥 하나 폭쯤 열려 있습니다. 그 틈으로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그러니까 제 몸 어디가 어떻다는 이야기가, 복도 의자에 나란히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까지 흘러 나갑니다. 나만 듣고 싶었던 이야기가 어느새 다 같이 듣는 이야기가 되어 버린 순간이요. 꼭 병원만 그런 건 아닙니다. 은행 창구에서 직원이 제 통장 잔액이며 연체 내역을 또렷한 목소리로 확인해 줄 때, 뒷줄에 선 사람의 귀에도 그 숫자가 그대로 닿습니다. 관공서 민원 창구에서 제 가족 관계나 형편을 묻는 질문에 답하다 보면, 옆 창구의 낯선 사람과 어깨를 맞댄 채 제 사정을 공개적으로 늘어놓게 되죠. 무슨 큰일이 난 것도 아닌데, 그 자리를 빠져나오는 길에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헐벗은 기분이 듭니다. 혹시, 익숙한 장면 아니신가요?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문을 끝까지 닫지 않은 그분이 무심했던 걸까요. 꼭 그렇진 않습니다. 의사 선생님도, 간호사 선생님도, 창구 직원분도 충분히 다정했을 수 있어요. 오히려 친절한 분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도 제 이야기는 복도까지 흘러 나갔습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모두가 친절한데, 정작 한 사람은 작아졌으니까요.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은 이 어긋남을 들여다보게 해 줍니다. 그는 좋은 사회를 이야기할 때 두 가지를 나눠서 봅니다. 하나는 구성원들이 서로 예의 바르게 대하는 사회고, 다른 하나는 제도 자체가 사람을 깎아내리지 않는 사회입니다.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같은 게 아니에요. 사람은 더없이 친절한데, 그 사람이 몸담은 제도엔 정작 '한 사람을 조용히 지켜 줄 자리'가 없을 수 있다는 겁니다. 병명이 복도까지 흐른 건 누가 모질어서가 아닙니다. 그 공간에 처음부터 '내 이야기를 나만 듣게 둘 칸'이 설계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진료실은 환자를 효율적으로 받고 내...

마지막 날 '수고했다' 한마디로 끝났습니다 — 그런데 끝난 게 정말 일뿐이었을까요

계약직이나 인턴, 혹은 짧게 투입되는 일을 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그런 자리에는 대개 정해진 마지막 날이 있습니다. 그날이 되면 그동안 손에 익힌 것들을 다음 사람에게 차근차근 넘기는 인수인계를 하고,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하는 따뜻한 인사 한마디를 듣고, 책상 위의 물건을 챙겨 일어섭니다. 누가 모질게 군 것도 아니고, 마지막까지 다들 친절했는데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길에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허전합니다. 혹시, 익숙한 장면 아니신가요? 꼭 계약이 끝나는 자리만 그런 건 아닙니다. 몇 달짜리 프로젝트에 잠깐 합류해 매일같이 같이 점심을 먹던 사람들과, 일이 마무리되자 거짓말처럼 연락이 끊길 때. 급할 때만 찾던 외주 동료에게서, 납품이 끝난 뒤로는 안부 한 줄 오지 않을 때. 그 순간 우리는 어렴풋이 느낍니다. 어제까지 분명 함께였던 사이가, 오늘 일이 끝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거짓말처럼 가벼워졌다는 것을요.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수고했다'는 마지막 인사가 야박한 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다정한 말이죠. 다만 이상한 건, 그 인사가 따뜻할수록 관계가 딱 '일이 끝나는 그 지점'에서 같이 끝나 버린다는 거예요. 마치 잘 마무리된 거래의 마지막 줄, 정산이 끝났다는 도장처럼요.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우리가 사람을 두 가지 방식으로 대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어떤 쓸모를 위한 수단으로 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쓸모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을 결코 한낱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늘 그 자체로 목적으로도 대하라고 말했어요. 어려운 말 같지만 풀어 보면 단순합니다. 수단으로만 맺은 관계는 쓸모가 다하는 순간 함께 끝나지만, 목적으로 맺은 관계는 일이 끝나도 사람이 남는다는 거죠. 여기서 짚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 관계가 일과 함께 끝나 버린 건, 누가 인색하거나 못돼서가 아니라는 점이에요. 떠나보낸 쪽도 마지막까지 진심...

고마움은 분명 저에게 왔는데, 정작 저에게는 남지 않았습니다

배달을 마치고 문 앞에 음식을 내려놓고 돌아서는데, 잠시 뒤 휴대폰이 울립니다. 별점 다섯 개에 '친절하셨어요' 한마디. 별것 아닌 그 한 줄에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다음 콜을 받는 손이 조금 가벼워집니다. 혹시, 익숙한 장면 아니신가요? 꼭 배달만의 일은 아닙니다. 카페에서 손님이 '여기 직원분이 참 친절해요' 하고 웃어 줄 때, 콜센터에서 한참을 헤매던 고객이 마지막에 '덕분에 살았어요, 감사합니다' 하고 전화를 끊을 때, 마트 계산대에서 짐을 같이 정리해 준 뒤 '고마워요' 소리를 들을 때. 그 순간만큼은, 나라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분명히 가닿았다는 따뜻한 느낌이 차오릅니다. 오늘 하루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렇게 마음이 놓이는 거죠.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손님이 별점과 한마디로 알아본 건, 분명 '오늘 이 음식을 들고 빗속을 뚫고 문 앞까지 온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알아봄은 이상하게도 저에게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잠깐 제 마음을 데우고는, 곧 앱 속 어딘가의 평점과 배지로, 회사의 '고객 만족도'라는 숫자로 스르르 빨려 들어가 버리죠.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사람이 '내가 누구인가'를 혼자 힘으로 정하는 게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곁의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비춰 주느냐, 그 비춤이 모여 '나'라는 윤곽이 만들어진다는 거예요. 그는 이걸 '인정'이라고 불렀습니다. 누군가 나를 알아봐 준 그 마음이 나에게 되돌아와 머물 때, 비로소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감각이 또렷해진다는 거죠. 반대로 그 비춤이 나를 비껴가 버리면, 아무리 잘해도 어쩐지 내가 흐릿해집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짚고 싶어요. 그 칭찬이 저에게 남지 않는 건, 누가 야박하거나 욕심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손님도, 회사도 누구 하나 인색하지 않았어요. 다만 이 시스템 안에는 애초에 그 알아봄이 ...

'그건 돈이 안 돼' 한마디에 접힌 것 — 닫힌 건 꿈이었을까, 그 꿈이 설 자리였을까

하고 싶은 일이 하나 생깁니다. 한참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가, 어느 날 큰맘 먹고 조심스레 꺼내 봅니다. 그런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건 돈이 안 돼' 한마디가 먼저 돌아옵니다. 거기서 더 보탤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접힙니다. 누가 화를 낸 것도 아니고, 비웃은 것도 아닙니다. 그저 짧은 한 문장에 문이 닫혔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로 그 꿈을 다시 입에 올리기가 어려워집니다. 혹시 비슷한 장면을 지나오신 적 있으신가요. 꼭 어린 시절 진로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회사에서 해 보고 싶은 일을 말했더니 '그게 매출이 나오겠어?'로 정리될 때, 오랜 취미를 좀 더 깊이 해 보고 싶다고 했다가 '그거 해서 뭐 하게'라는 말에 멈출 때. 말한 사람도 딱히 악의가 있던 건 아닙니다. 그런데도 어쩐지 그 한마디를 지나오고 나면, 마음 한구석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슬그머니 내려놓게 됩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먼저 짚어 둘 게 있습니다. '돈이 안 된다'고 말한 사람은, 대개 그 사람을 깎아내리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걱정에서 나온 말일 때가 많죠. 그러니 무언가가 접혔다면, 그건 누군가의 못된 마음 때문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미래를 바라보는 길이, 어느새 '돈이 되느냐' 하나로만 좁아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아니라, 살아볼 수 있는 길 인도의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은 평생 한 가지 질문을 붙들었습니다. 한 사람이 잘 산다는 건 대체 무엇으로 가늠되는가. 흔히 우리는 통장 잔고나 연봉 같은, 가진 것의 크기로 답합니다. 그런데 센의 답은 조금 다릅니다. 진짜 중요한 건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삶을 살아볼 수 있느냐'라는 거예요. 같은 돈을 쥐고 있어도, 어떤 사람에게는 열린 길이 여럿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단 하나뿐일 수 있습니다. 센은 바로 그 '살아볼 수 있는...

확인은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 다만, 조용히 할 자리가 비어 있었을 뿐

장애인 주차구역에 차를 대고 내리는데, 단속하시는 분이 다가옵니다. 자격을 확인해야 한다며 묻기 시작하는데, 마침 그 자리는 사람들이 줄지어 지나는 통로 한복판입니다. 어디가, 어떻게 불편하신 거냐고. 그 물음에 줄 서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제게로 옵니다. 사실 별다른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카드를 보여 드리고, 몇 마디를 보태고, 확인이 끝나면 가던 길을 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돌아서는 걸음이 조금 작아져 있습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여러 사람 앞에서 제 몸을 한 번 해명하고 나온 기분이 드는 거죠. 혹시 비슷한 순간을 지나오신 적 있으신가요. 꼭 주차장만의 일은 아닙니다. 공항 보안검색대에서 몸에 지닌 의료 기기를 줄 선 사람들 앞에서 설명해야 할 때, 관공서 창구에서 내 사정을 옆 사람도 다 듣게 소리 내어 확인받을 때, 병원 접수대에서 어디가 아파서 왔는지를 대기 줄 앞에서 또박또박 말해야 할 때. 누가 저를 나무란 것도, 거친 말이 오간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 자리를 지나온 사람만 어쩐지 어깨가 한 뼘 내려갑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먼저 분명히 해 둘 게 있습니다. 자격을 확인하는 일 자체는 조금도 잘못이 아닙니다. 꼭 필요한 사람이 그 자리를 쓰도록 살피는 건 오히려 마땅한 일이죠. 그러니 제가 느낀 그 작아짐은, 확인했다는 사실에서 온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서 온 걸까요. 같은 확인인데, 누구는 선 채로 누구는 작아진 채로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존중'이라는 말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입니다. 그가 말하는 존중은 조금 뜻밖이에요.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칭찬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 사람을 돕거나 확인할 때조차 그를 작아지게 하지 않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같은 도움도, 같은 확인도, 사람을 선 채로 둘 수 있고 어느새 무릎 꿇린 자세로 만들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둘을 가르는 건, 세넷이 보기에 돕는 사람의 마음씨가 얼마나 따뜻한가가 아닙니다. 애초에 ...

‘사람 바꿔’라는 말 속의 사람 — 정작 마주하던 그 사람은 거기 없었습니다

전화기를 붙들고 한참 상담을 이어 가다 보면, 어느 순간 불쑥 건너오는 말이 있습니다. “됐고, 윗사람 바꿔요. 그쪽 말고.” 그 말을 가만히 받아 본 적이 있으실 수도 있고, 답답함이 차올라 직접 해 본 적이 있으실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살면서 한 번쯤은 스쳐 본 장면일 거예요. 혹시 어딘가, 익숙하지 않으신가요. 꼭 전화기 너머만의 일은 아닙니다. 식당에서 무언가 어긋났을 때 눈앞의 종업원은 건너뛰고 곧장 “매니저 불러 주세요” 하고 손을 들 때, 창구 앞에서 담당자의 설명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그냥 윗선이랑 얘기할게요” 하며 자리를 옮길 때 — 우리는 닮은 장면을 마주합니다. 조금 전까지 나와 눈을 맞추고 말을 주고받던 한 사람이, 어느새 ‘거쳐 가는 통로’가 되어 슬그머니 지워지는 장면이요.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 손을 든 쪽이 저였던 날도 분명 있었습니다. ‘사람 바꿔’라는 말 속의 사람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미운 건 “윗사람 바꿔”라는 말 자체가 아닙니다. 정말 이상한 건 따로 있어요. 그 짧은 문장 안에 ‘사람’이라는 단어가 분명히 들어 있는데, 정작 그 전화를 받고 있던 사람은 거기서 쏙 빠져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을 바꿔 달라’는 말 속의 ‘사람’에, 지금 마주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은 처음부터 포함되어 있지 않은 거죠.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는 방식을 두 갈래로 나눠 들여다봤습니다. 하나는 마주 선 ‘너’로 부르며 만나는 길(나-너)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기능을 거쳐 가는 ‘그것’으로 대하는 길(나-그것)입니다. ‘너’로 부를 때 한 사람은 온전한 상대가 되어 마주 서지만, ‘그것’으로 대하는 순간 그 사람은 무언가를 처리해 주는 창구, 문제를 위로 넘겨 주는 통로로 줄어듭니다. 같은 얼굴을 두고도, 마주 보느냐 거쳐 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자리에 서게 되는 거예요.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 말을 건넨 사람이 유독 모진 사람이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콜센터라...

그 기획서 표지에, 만든 사람을 적는 칸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며칠을 머릿속에 굴리고, 밤늦게까지 자료를 들춰 가며 한 장 한 장 다듬은 기획서가 있었습니다. 드디어 윗선까지 올라간다는 소식이 들렸고, 내심 조금 설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보고 자리에서 표지에 적혀 있던 이름은 제 이름이 아니라 부장님 이름이었습니다. 문서 안에 분명히 제 밤이 들어 있는데, 그 밤을 보낸 사람의 자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 이런 장면, 어딘가에서 한 번쯤 겪어 보신 적 있으신가요? 꼭 보고서 표지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회의에서 며칠 전 제가 꺼냈다가 묻혔던 아이디어가,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오자 “좋은데요” 하고 채택될 때. 손이 많이 간 일을 두고 “이거 누가 했어?”라는 물음에 정작 한 일을 한 사람은 빠진 채 다른 이름이 불릴 때. 우리는 비슷한 결의 순간을 생각보다 자주 마주칩니다. 대개 우리는 여기서 ‘저 사람이 가로챘다’ 하고 생각을 멈춥니다. 서운하고, 억울하고요. 그럴 만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장면을, 누군가를 탓하기 전에 한 걸음만 떨어져서 다시 봐볼게요. 돌아오지 못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사람이 사람으로 선다는 게 언제인지를 조금 다르게 짚습니다. 그는 우리가 한 일이 ‘아, 저 사람이 했구나’ 하고 다시 자기에게 돌아와 불릴 때, 그때 비로소 한 사람이 온전히 선다고 보았습니다. 어려운 말로는 인정이라고 부르지만, 풀어 보면 그저 ‘한 번 제대로 불려지는 일’입니다. 내가 보낸 시간과 마음이 허공으로 흩어지지 않고, 내 쪽으로 한 번 돌아와 내 이름과 만나는 일이요. 그렇게 보면, 그 보고 자리에서 진짜로 비어 있던 건 부장님의 양심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 표지를, 그리고 보고가 위로 올라가는 그 길 전체를 천천히 되감아 보면 묘한 게 하나 보입니다. 거기에는 ‘누가 보고하는가’를 적는 칸은 또렷하게 마련돼 있는데, ‘누가 만들었는가’를 적는 칸은 처음부터 열려 있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의 일이 분명히 그 안에 있었는데, 그 일을 한 사람이 머물 자...

‘시키는 거나 잘하라’던 자리 — 거기엔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적을 칸이 없었던 걸까요

새 일을 받아 드는 아침을 한번 떠올려 봅니다. 자리에 앉으면 해야 할 일의 목록이 먼저 도착합니다. 언제까지, 어떤 형식으로, 누구에게 넘길지. 빈틈없이 적혀 있죠. 그런데 그 목록 어디에도 ‘당신은 무엇을 해 보고 싶으냐’를 묻는 줄은 없습니다. 대신 자주 돌아오는 말은 따로 있죠. ‘시키는 거나 잘하면 된다.’ 직접 이 말을 들어 보셨든, 옆자리 동료가 듣는 걸 가만히 지켜보셨든 — 혹시 이 장면, 어딘가 익숙하지 않으신가요. 꼭 거창한 순간이 아니어도 그렇습니다. 한 해를 정리하는 면담 자리에서, 무엇을 해냈는지는 줄줄이 확인하면서도 ‘앞으로 무엇을 해 보고 싶으냐’는 끝내 물어보지 않을 때. 회의에서 의견을 보태려다 ‘그건 네가 정할 게 아니야’ 한마디에 도로 입을 다물게 될 때. 우리는 비슷한 장면을 마주합니다. 한 사람이 잠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펼치는 사람이 아니라, 정해진 일을 채워 넣는 손이 되어 그 자리에 서 있게 되는 장면이요. ‘시키는 일’을 채우는 자리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펴는 자리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시키는 걸 잘한다’는 건, 이미 정해진 일을 빈틈없이 채워 넣는 자리입니다. 그 자체로 나쁜 일은 아니죠. 다만 그 안에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가 들어설 칸이 따로 없습니다. 할 일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고, 사람은 그 정해진 틀에 자기를 맞춰 넣을 뿐이니까요.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이 자리를 들여다볼 한 가지 시선을 건넵니다. 그는 사람의 존엄을, 어떤 능력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그 능력을 실제로 펼칠 자유와 여건이 열려 있느냐로 봤습니다. 이걸 역량 접근법이라고 부르죠. 그러니까 중요한 건 ‘이 사람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만이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꺼내 펼칠 틈이 그 자리에 있느냐’라는 겁니다. 아무리 많은 걸 품고 있어도 펼칠 틈이 없다면, 그건 닫힌 채로 남아 버리니까요.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 상사가 유독 못된 사람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책상에 툭 놓이던 보고서를, 오늘은 조금 다르게 봅니다

회의 중이었습니다. 며칠을 붙들고 다듬은 보고서를 상사가 받아 들더니, 잠깐 훑어보고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책상에 툭 내려놓더라고요. 종이가 미끄러지며 가벼운 소리를 냈고,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습니다. 누구도 한마디 보태지 않았지만, 그 짧은 동작 하나로 회의실의 공기가 조용히 바뀌었습니다. 혹시 이런 장면, 어딘가에서 한 번쯤 겪어 보신 적 있으신가요? 꼭 회의실만의 풍경은 아닙니다. 카페 계산대에서 카드가 던지듯 되돌아올 때, 민원 창구에서 서류가 밀리듯 다시 내 앞으로 넘어올 때, 우리는 비슷한 결의 장면을 마주합니다. 분명 종이 한 장, 카드 한 장이 오갔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가볍게 놓인 건 물건만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대개 우리는 여기서 ‘그 사람이 무례했다’ 하고 생각을 멈춥니다. 그럴 만도 하고요. 그런데 오늘은 이 장면을, 사람을 탓하기 전에 한 걸음만 떨어져서 다시 봐볼게요. 던져진 건, 정말 종이뿐이었을까요 그 회의실을 천천히 되감아 보면, 묘한 게 하나 보입니다. 그 방에는 보고서를 검토하고, 반려하고, 다시 고치라 지시하는 절차는 빈틈없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어디가 부족한지 지적할 자리도, 일정을 다그칠 자리도 다 있었고요. 그런데 정작 그 보고서를 밤늦게까지 매만진 ‘사람’을, 그 깎임의 순간에 지켜 줄 자리만은 어디에도 마련돼 있지 않았습니다.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은 좋은 사회를 가르는 물음을 조금 다르게 던집니다. 그는 ‘이 사회가 얼마나 정의로운가’가 아니라 ‘이 사회의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는 않는가’를 먼저 물었습니다. 개인이 친절한지 무례한지를 넘어서, 한 사람을 모욕하지 않도록 짜인 구조가 있느냐를 들여다본 거죠. 종이는 던질 수 있어도 사람은 던질 수 없는 건데, 그 방에서는 그 둘이 너무 쉽게 포개졌습니다. 그렇게 보면, 진짜 문제는 한 사람의 인성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 상사가 유독 모질어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선 사람을 깎는 일이 ‘강하고 솔직한 피드백’처럼 보이도...

‘반 평균 깎아먹는 애’ — 한 사람을, 숫자 한 칸으로 줄일 수 있을까요

시험지를 돌려받던 교실을 한번 떠올려 봅니다. 점수가 적힌 종이가 한 장씩 책상 위에 놓이고, 누군가는 슬쩍 손바닥으로 가립니다. 그때 교탁에서 이런 말이 들려옵니다. ‘너는 반 평균 깎아먹는 애야.’ 직접 그 말을 들어 보셨든, 아니면 옆자리 친구가 그 말을 듣는 걸 가만히 지켜보셨든 — 혹시 이 장면, 어딘가 익숙하지 않으신가요. 꼭 교실만의 일은 아닙니다. 성적표를 받아 든 저녁 식탁에서 ‘이 점수로 뭐가 되려고 그러니’라는 말이 떨어질 때, 형제끼리 ‘누구는 몇 등인데 너는’ 하고 나란히 세워질 때, 우리는 비슷한 장면을 마주합니다. 한 사람이 잠깐, 자기 자신이 아니라 어떤 숫자가 되어 그 자리에 서 있게 되는 장면이요. 그 순간 그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요. ‘부품’으로 불릴 때와 ‘사람’으로 불릴 때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반 평균 깎아먹는 애’라는 말 속에서, 한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 거기 서 있지 못합니다. ‘반 평균’이라는 숫자에 더해지고 빠지는 한 칸으로만 남아 있죠. 그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침에 어떤 마음으로 교문을 들어섰는지는 그 한마디 안에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이 자리를 들여다볼 한 가지 시선을 건넵니다. 그는 사람을 한낱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누구든 어떤 숫자나 결과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 — 그러니까 그 자체로 온전한 한 사람으로 대해져야 한다고요. 쓸모를 따지는 시선과, 사람을 사람으로 마주하는 시선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겁니다.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 선생님이 유독 못된 사람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교실을 실제로 움직이는 건 평균이고 등수인데, 그 표 어디에도 ‘이 아이가 어떤 사람인가’를 적어 넣을 칸이 없습니다. 적을 칸이 없으니, 사람은 결국 숫자로 환산되어 남습니다. 성적을 적는 일 자체가 잘못이 아니라, 성적밖에 적을 칸이 없는 그 표가 조용히 사람을 지우는 거죠. 한 사람을 부품으로 부르게 만드는 건...

다 같이 웃었던 농담 하나를, 오늘은 조금 다르게 봅니다

회식 자리, 술이 한두 잔 돌고 분위기가 적당히 풀렸을 때입니다. 누군가 웃으며 한마디 던집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패기가 없어.’ 테이블 곳곳에서 가벼운 웃음이 번지고, 분위기는 한층 더 부드러워집니다. 아마 그 자리에 있던 누군가도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같이 웃었을 겁니다. 혹시 이런 자리에서, 영문도 모른 채 함께 웃어 본 적 한 번쯤 있으신가요? 꼭 회식만의 풍경은 아닙니다. 오랜만에 모인 명절 식탁에서 ‘요즘 애들은 끈기가 없다’는 말이 나올 때, 동창 모임에서 ‘걔는 원래 그런 애잖아’라는 한마디로 누군가가 한 번에 정리될 때, 우리는 비슷한 장면을 마주합니다. 한 사람이 분명 그 자리에 앉아 있는데도, 어느 순간 그 사람의 얼굴은 흐려지고 ‘요즘 애들’, ‘그런 부류’라는 이름표만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남는 장면이요. ‘요즘 애들’이라는 말 안에서 흐려진 얼굴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웃음이 번지던 그 순간을 천천히 되감아 보면, 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테이블에 앉은 그 ‘젊은 사람’은 더 이상 한 명 한 명의 얼굴이 아니라 ‘요즘 애들’이라는 한 덩어리가 됩니다. 어젯밤 늦게까지 붙들고 있던 마감도, 아무 말 없이 메워 둔 누군가의 빈자리도, 그 한마디 안에서는 깨끗이 지워지고요. 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이 자리를 들여다볼 한 가지 시선을 건넵니다. 그는 사람이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설 수 있는 건, 자기가 한 일과 자기라는 존재가 누군가에게 ‘제대로 보이고 받아들여질’ 때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걸 인정(Anerkennung)이라 불렀는데, 거꾸로 한 사람이 하나의 부류로 뭉뚱그려지는 순간 그 인정은 소리 없이 사라집니다. 보이긴 보이는데, ‘그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게 되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누구를 탓하긴 어렵습니다. 농담을 던진 사람이 유독 못돼서도 아니고, 같이 웃은 사람들이 모질어서도 아니에요. 더 깊은 곳을 보면, 그 테이블에는 애초에 한 사람이 ‘한 사람’으로 앉을 자리가 마련돼 있지 ...

문 앞에 '누구나 환영'이라 적혀 있었지만, 그 문엔 계단 세 칸이 있었습니다

동네에 가게가 하나 새로 생겼습니다. 유리문에 ‘누구나 환영합니다’라고 큼지막하게 적혀 있죠. 보기만 해도 마음이 조금 따뜻해지는 문구입니다. 그런데 그 문 바로 앞에는 계단이 세 칸 놓여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 앞까지 다가왔다가, 휠체어로는 도무지 올라설 수가 없어 잠깐 멈춰 서고, 결국 조용히 방향을 돌립니다. 혹시 이런 가게 앞을 무심코 지나치신 적, 한 번쯤 있으신가요? 꼭 그 가게만의 일은 아닙니다. ‘모두 오세요’라고 적힌 동네 행사 안내문 아래로 가파른 돌계단이 이어질 때, ‘누구나 이용 가능’이라 쓰인 시설인데 정작 화장실 문이 휠체어가 들어갈 만큼 넓지 않을 때, 혹은 ‘전 연령 환영’이라면서 유아차를 끌고는 도저히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좁은 입구일 때 — 우리는 비슷한 장면을 마주합니다. 환영한다는 말은 분명 거기 있는데, 정작 그 말 안으로 걸어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 문밖에 남겨지는 장면이요. ‘들어와도 된다’와 ‘들어갈 수 있다’ 사이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누구나 환영합니다’라는 문장은 분명 친절합니다. 누구도 막지 않겠다는 선언이니까요. 가게 주인이 누군가를 일부러 밀어내려고 그 계단을 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여기엔 탓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문밖에 남겨지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 어긋남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요.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이 자리를 들여다볼 한 가지 시선을 건넵니다. 그는 묻습니다 — 권리가 종이에 적혀 있는 것과, 그 권리를 실제로 펼칠 수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고요. ‘들어와도 된다’는 허락이 아무리 너그러워도, 그 사람이 실제로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 있지 않다면, 그 허락은 그 사람에게 닿지 못한 채 허공에 떠 있게 됩니다. 그가 보는 존엄은 바로 그 ‘실제로 할 수 있음’의 자리에 있습니다. 무엇을 해도 된다고 말해 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자기 삶을 정말로 펼칠 수 있는 자유가 마련되어 있느냐에 있다는 시선이죠. 그래서 이건 누군가가...

사랑이 가득한 식탁에도, 물어봐 주는 칸은 비어 있었습니다

명절이면 한 번쯤 마주하게 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친척들이 둥글게 둘러앉은 자리에서, 부모님이 제 성적표를 꺼내 펼쳐 보이시죠. 자랑스러운 웃음과 함께일 때도 있고, 작은 한숨과 함께일 때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 종이 한 장이 식탁 한가운데로 올라오고, 둘러앉은 어른들의 눈길이 잠깐 거기 모입니다. 혹시, 비슷한 자리에 앉아 보신 적 있으신가요? 꼭 성적표만의 일은 아닙니다. 친척 모임에서 “쟤는 이번에 어디 붙었다더라” 하는 말이 오갈 때, 가족 단톡방에 사촌의 합격 소식이 사진과 함께 올라올 때, 모처럼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의 연봉이나 결혼 소식이 화제가 될 때 — 우리는 비슷한 공기 속에 섭니다. 딱히 누가 나쁜 말을 한 것도 아니고, 다들 웃고 있는데도,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작아지는 그 느낌이요. 큰일이 아니어서 그냥 넘기게 되고, 그래서 더 자주 반복되는 장면이죠. 사랑과 모욕이 같은 식탁에 앉을 때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부모님은 분명 저를 사랑해서, 자랑하고 싶어서 그러셨을 겁니다. 미워서 그런 게 절대 아니죠. 그러니 여기엔 탓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마음 한쪽이 불편했다면, 그 불편함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요.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라는 말로 이 자리를 들여다볼 한 가지 시선을 건넵니다. 그가 말하는 품위 있는 사회란, 그 안의 제도와 관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예요. 여기서 모욕이란 누가 화를 내거나 욕을 퍼붓는 일이 아닙니다. 훨씬 조용한 것이죠. 한 사람을 온전한 인격이 아니라, 펼쳐서 보여주고 견주는 ‘대상’으로 다룰 때 — 바로 그때 모욕은 소리 없이 생겨납니다. 사랑하는 마음과 나란히, 같은 식탁에 앉은 채로요. 그래서 이건 부모님이 유독 무심해서 벌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더 깊은 곳을 보면, ‘자식 자랑’이라는 익숙한 의례 자체에 비어 있는 칸이 하나 있어요. 정작 그 성적표의 주인이 “이거, 펼쳐 보여도 괜찮을까요?” 하고 물음을 받을 자리가 처음부터 ...

갈아 끼울 수 있던 건 자리였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일하다 보면 한 번쯤은 듣게 되는 말이 있습니다.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아.” 화를 내며 던지는 것도 아니고, 큰일이라는 듯 무게를 잡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툭, 지나가는 말처럼 가볍게 흘러나오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볍게 던져진 말일수록 더 오래 남습니다. 그날 저녁까지, 어쩌면 며칠 동안 마음 한구석에 걸려 있곤 해요. 혹시, 익숙한 장면 아니신가요? 꼭 그 한마디만의 일은 아닙니다. 며칠 밤을 들여 정리한 일을 두고 “이건 누가 해도 똑같지” 하는 말을 들을 때, 면접 자리에서 “지원자야 많으니까요”라는 말이 스칠 때, 우리는 비슷한 자리에 섭니다. 딱히 욕을 먹은 것도 아니고 손해를 본 것도 아닌데, 묘하게 한 뼘쯤 작아지는 그 기분 — 한 번쯤은 겪어 보셨을 거예요. 큰 사건이 아니어서 그냥 넘기게 되는, 그래서 더 자주 반복되는 장면이죠. 그 말이 아픈, 진짜 자리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그 말이 아픈 건, 정말로 나를 대신할 사람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솔직히 말하면, 어지간한 일은 다른 누군가도 해낼 수 있는 게 맞습니다. 아픈 건 다른 데 있어요. 사람을 ‘언제든 갈아 끼울 수 있는 기능’으로 보는 그 셈법 자체가, 거기 있던 한 사람을 통째로 빠뜨리고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이걸 들여다보는 한 문장을 남겼습니다. 흔히 ‘목적의 정식’이라고 부르는 말인데,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 사람을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로‘만’ 다루지 말고, 그 자체로 목적인 존재로 대하라는 겁니다. 여기서 작지만 결정적인 말이 ‘만’이에요. 우리는 일터에서 늘 서로를 어느 정도는 도구로 대합니다. 일을 부탁하고, 역할을 맡기고, 성과를 기대하죠. 그건 잘못이 아니에요. 다만 그 사람을 ‘오직 기능으로만’ 보고, 그 너머에 한 사람이 통째로 서 있다는 사실을 지워 버릴 때,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빠져나갑니다. 그러니 이건 말한 사람이 유독 못돼서 벌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더 깊은 곳을 보면, 그 자리를 채우는...

그 가게엔, 10년을 적어 둘 칸이 없었습니다

오래 드나든 단골 가게가 있습니다. 십 년 가까이 같은 문을 밀고 들어가, 늘 익숙한 인사를 주고받던 곳이요. 그런데 어느 날, 새로 온 직원이 저를 아주 정중하게 맞아 주더라고요. 친절했고, 예의도 발랐습니다. 다만 그 정중함이 — 처음 보는 손님을 대하는 정중함이었어요. “처음 오셨죠?” 하는 그 한마디 앞에서, 저는 잠깐 멈칫했습니다. 혹시, 비슷한 순간을 겪어 보신 적 있으신가요? 꼭 가게만의 일은 아닙니다. 몇 해를 산 건물인데 새로 온 경비원이 “몇 층 가세요?” 하고 물을 때, 오래 다닌 병원인데 갈 때마다 제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야 할 때, 우리는 비슷한 자리에 섭니다. 나를 분명히 아는 곳이라고 여겼는데, 정작 그곳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죠. 무례한 일을 당한 것도 아닌데 묘하게 머쓱하고 서운해지는 그 기분 — 한 번쯤은 겪어 보셨을 거예요. 그 10년은, 어디에 적혀 있었을까요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그 직원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저를 처음 봤으니 처음 보는 손님처럼 대한 게 당연하죠. 이상한 건 직원이 아니라, 제가 그 가게에 쌓아 온 십 년이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에요. 매출도, 재고도, 적립 포인트도 빠짐없이 기록되는 그 가게에 — 정작 ‘이 사람은 십 년을 함께한 단골’이라고 적어 둘 칸은 어디에도 없었던 겁니다. 그 기억은 오롯이 떠난 직원 한 사람의 머릿속에만 있었고, 그가 떠나자 저는 자연스럽게 다시 ‘처음 온 사람’이 되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사람이 사람으로 선다는 게 무엇인지를 이렇게 들여다봅니다. 내가 누구인지가 누군가에게 ‘아는 얼굴’로 되돌아와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우리는 한 사람으로 선다고요. 그는 이걸 인정(Anerkennung)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렵게 들리지만 뜻은 단순해요. 거창한 칭찬이나 보상이 아니라, ‘아, 그 사람’ 하고 알아봐 주는 그 작은 끄덕임 — 그것이 사람을 사람으로 세운다는 겁니다. 이 눈으로 가게를 다시 봐...

그 이력서엔, 자란 걸 적을 칸이 없었습니다

한동안 일을 쉬었다가, 다시 시작해 보려고 이력서를 펼치는 날이 있습니다. 화면을 띄우고 커서를 올려놓는데, 정작 제일 먼저 머릿속을 채우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더라고요. ‘이 비어 있던 시간을 대체 어떻게 설명하지’ 하는 걱정이 먼저 자리를 차지합니다. 자격증을 적는 칸보다, 공백을 해명하는 문장을 어떻게 다듬을지가 더 무거워지는 거예요. 혹시, 익숙한 장면 아니신가요? 꼭 재취업만의 일도 아닙니다. 오랜만에 나간 모임에서 “그동안 뭐 하고 지냈어?”라는 가벼운 질문 앞에 괜히 말문이 막힐 때, 서류 한 장을 채우다 ‘해당 없음’에 체크를 거듭하게 될 때, 우리는 비슷한 자리에 서 봅니다. 분명 그 시간에도 무언가를 견디고, 배우고, 누군가를 돌보며 살아왔는데 — 막상 적을 자리에 앉으면 ‘하지 못한 것’의 목록부터 길게 떠오르는 거죠. 먼저 읽히는 건, 내가 못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이력서라는 자리에서 제일 먼저 읽히는 건, 제가 ‘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제가 ‘하지 못한 시간’입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그 종이가 본래 묻고 싶은 건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요”일 텐데, 정작 답하는 사람은 “저는 이 기간 동안 일을 멈췄습니다”부터 적게 되니까요.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역량 접근법’이라는 시선을 이야기합니다. 어렵게 들리지만 뜻은 단순해요. 한 사람의 존엄은 권리를 종이 위에 갖는 것만으로 서는 게 아니라, 자기 안의 힘을 실제로 펼칠 자리가 주어질 때 비로소 선다는 겁니다. ‘기회가 열려 있다’는 말과 ‘실제로 해 볼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거죠. 이 눈으로 이력서를 다시 봐볼게요. 그 양식에는 ‘공백 기간’을 적는 칸은 있어도, 그 공백 동안 무엇이 자랐는지를 적는 칸은 한 줄도 없습니다. 누가 못된 마음을 먹어서가 아니에요. 그저 그 양식이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멈춤 없이 이어진 경력을 기준으로 칸이 짜여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잠시 ...

그 단톡방엔 못된 사람이 없었습니다

단체 대화방에 무심코 보낸 메시지 하나가 있습니다. 오타였을 수도, 조금 엉뚱한 말이었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며칠 뒤, 누군가 그 메시지를 캡처해 다시 올립니다. 그 아래로 웃는 이모티콘이 줄줄이 달리고요. 화면 너머의 사람들은 그저 가볍게 웃고 있는데, 캡처된 쪽은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혹시, 비슷한 장면을 겪어 보신 적 있으신가요? 꼭 단톡방만의 일도 아닙니다. 회식 자리에서 한참 지난 누군가의 실수담이 다시 안주로 오를 때, 단체 사진 속 한 사람의 표정만 골라 놀림감이 될 때, 오래전 어떤 흑역사가 모임 때마다 어김없이 소환될 때. 그 자리의 누구도 딱히 못된 마음을 품지는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한 사람만은 그때마다 조금씩 작아집니다. “그냥 장난인데 뭘 그래”라는 말이 가볍게 오가는 동안에요. 못된 사람이 없는데도 누가 작아질 때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웃는 이모티콘을 누른 사람들 중에 정말 못된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었을 거예요. 다들 그냥 분위기를 맞췄고, 가볍게 웃었을 뿐이죠. 그래서 누구를 탓하기도 애매합니다. 미워할 악당이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바로 여기에, 우리가 자주 놓치는 한 가지가 숨어 있습니다. 사람을 작게 만드는 일이 꼭 누군가의 나쁜 마음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이스라엘의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좋은 사회를 가르는 기준이 사람들끼리 얼마나 서로 친절하냐를 넘어선다는 이야기예요. 구성원 한 명 한 명이 다정해도, 그들이 모여 만든 제도와 공동체 자체가 사람을 깎아내린다면 그 사회는 아직 품위에 닿지 못했다는 것이죠. 핵심은 모욕이 개인의 악의가 아니라 ‘구조’에서도 올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눈으로 단톡방을 다시 봐볼게요. 한 사람의 실수가 지워질 자리 없이 캡처되고, 저장되고, 언제든 다시 소환될 수 있는 구조. 그 구조 안에서는 아무도 악의를 품지 않아도 누군가는 영영 작아질 수 있습니다. 화기애애해 보이죠. 그런데...

‘내 일처럼 해 달라’는 말의 안쪽

채용 공고를 들여다보다 어떤 문장에서 잠깐 멈추게 될 때가 있습니다. “주인의식을 갖고, 회사를 내 일처럼 여기실 분을 찾습니다.” 면접장에서도 비슷한 말을 듣곤 하죠.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보다, 자기 일처럼 책임지는 사람을 원합니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혹시, 익숙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살짝 걸리는 문장은 아니셨나요? 비슷한 장면은 일터 바깥에도 많습니다. “여기 네 집이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있어”라는 말을 듣지만 정작 무엇 하나 내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는 자리. “팀이니까 다 같이 책임지는 거야”라는 말은 자주 나오는데, 정작 결정은 늘 다른 사람이 내리는 자리. ‘내 것처럼’이라는 말이 권유처럼 건너오지만, 그 일이 정말 내 것이 되는 길은 어디에도 열려 있지 않은 그런 순간들 말이에요. ‘내 일처럼’이라는 부탁의 안쪽 그런데 이 문장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회사를 내 일처럼 여겨 달라”는 말은, 곰곰이 들여다보면 하나의 부탁입니다. 회사의 목적을 당신의 목적으로 삼아 달라는 부탁. 회사가 가고 싶은 곳을 당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받아들여 달라는 것이죠. 그 자체로는 나쁜 부탁이 아닙니다. 마음이 걸리는 건 그다음입니다. 그 일을 ‘내 일처럼’ 떠안았는데, 정작 그 일의 결정권도, 끝나고 돌아오는 몫도, 다 끝난 뒤 남는 이름도 내 것이 아닐 때가 많다는 것이에요.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사람을 대하는 한 가지 원칙을 남겼습니다. 누군가를 한낱 수단으로만 쓰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그 자체로 목적인 사람으로 대하라는 것이었어요. 어렵게 들리지만 뜻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것은 당연히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사람을 ‘쓰고 비우는 도구’로만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 사람도 자기 삶의 목적을 가진 한 명의 주체라는 사실이, 일을 맡기는 순간에도 지워져선 안 된다는 뜻이지요. 이 시선으로 다시 보면, ‘주인의식을 가지라’는 요구의 묘한 구조가 드러납니다. 주인의식을 가지라...

아이디어가 '우리 것'이 되는 순간

팀 발표가 끝나고, 동료들이 박수를 쳤습니다. 슬라이드 위에는 제가 몇 주 전부터 구상했던 아이디어가 그대로 담겨 있었어요. 다이어그램도, 핵심 문장도.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제 이름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마 어딘가 익숙한 장면이실지도 모릅니다. 회의 중에 제가 꺼낸 말을 누군가 조금 다른 표현으로 다시 말했을 때 갑자기 “오, 그거 좋은데!”가 터지는 장면. 보고서 맨 앞에 팀장 이름만 올라가 있는 장면. 몇 달을 공들여 만든 기획이 ‘팀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발표되는 장면. 아이디어는 살아남았지만, 그것을 낸 사람은 어딘가로 조용히 증발해 버리는 그 순간들. 이름이 들어갈 자리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독일 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사람이 온전한 주체로 서려면 한 가지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내가 이룬 것이 ‘내가 이룬 것’으로 사회에서 되돌아오는 경험 — 그것을 그는 인정(Anerkennung)이라고 불렀어요. 칭찬이나 격려와는 결이 다릅니다. 칭찬은 누군가가 베풀어 주는 것이지만, 인정은 내 존재가 이 공동체의 기록에 새겨지는 것이에요. 기여한 사람의 이름이 그 기여 곁에 남는 것. 그 자리가 있어야 비로소 온전한 주체로 서 있다는 경험이 가능하다고, 그는 썼습니다. 그 발표 자리에서 아이디어는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만든 사람은 슬라이드 어디에도 없었어요. 나쁜 의도를 가진 누군가가 지운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보다는 더 자주, 이런 식으로 일이 벌어지죠 — 처음부터 그 이름이 들어갈 자리가 구조 안에 없었던 것이에요. 성과가 ‘우리 것’이 되는 순간, 그것을 만든 ‘나’는 조용히 흡수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예의의 문제가 아니라 — 누군가를 주체로 존재하게 해주는 자리가 처음부터 설계되지 않은 것에 가깝습니다. 그 투명함이 한 번이면 그냥 넘길 수 있어요. 두 번도. 그런데 그것이 반복될 때 우리가 잃는 것은 보상이나 인사 평가가 아닙니다. 내가 이 공동체 안에서 무언가를 만...

'그 나이에 무슨'이라는 말이 닫는 것

얼마 전, 배우고 싶은 것이 하나 생겼다고 말하는 사람을 떠올려 봅니다. 악기일 수도 있고, 수영일 수도 있고, 새 언어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속에서 한참을 굴리다가 저녁 식탁에서 슬쩍 꺼냅니다. 돌아온 첫마디는 이렇습니다. "그 나이에 무슨." 악의는 없습니다. 웃자고 한 말이고, 말한 사람도 들은 사람도 같이 웃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거기서 끝납니다. 비슷한 장면은 어렵지 않게 더 떠올릴 수 있습니다. 연차가 제법 쌓인 직장인이 다른 직무를 해보고 싶다고 하자 "이제 와서?"라는 반문이 돌아오는 장면. 나이 드신 부모님이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직접 해보겠다고 하시자 "제가 해드릴게요, 그냥 두세요" 하며 화면을 가져가는 장면. 모두 다정하고, 모두 평범하고, 모두 몇 초 만에 지나갑니다. 저도 이런 말들을 오래 별생각 없이 주고받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 짧은 장면을 조금 다르게 보게 하는 시선 하나를 만났습니다. 능력에 대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사람다운 삶의 조건을 이렇게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니라,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실제로 해볼 자유가 열려 있느냐라고요. 돈이나 건강 같은 것들이 소중한 이유도 결국 그것이 무언가를 '해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지,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 때문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시선으로 식탁의 장면을 다시 보면 이상한 점이 하나 드러납니다. "그 나이에 무슨"은 겉으로는 능력에 대한 말처럼 들립니다. 나이가 들어서 안 될 거라는 이야기처럼요. 그런데 정작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아무도 확인해 보지 않았습니다. 배워 본 적도, 시도해 본 적도 없으니까요. 할 수 있느냐는 해본 다음에야 알 수 있는 일인데, 그 말은 언제나 해보기 전에 먼저 도착합니다. 그러니 그 말은 능력의 문제를 짚은 게 아닙니다. 해보기도 전에 닫혀버린 문, 그러니까 기회의 문제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

다 들리는 자리에서, 소득을 소리 내어 말해야 했던 날

지원 신청 서류를 챙겨 주민센터 창구 앞에 섭니다.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리고, 드디어 제 차례. 서류를 밀어 넣자 직원이 한 줄 한 줄 훑어 내려갑니다. 그러다 고개를 들고, 옆줄에 선 사람도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다 들릴 만한 목소리로 묻습니다. "소득이… 이게 전부세요?" 그 순간 별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네" 하고 답하고, 도장을 받고, 서류를 챙겨 나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돌아오는 길이 조금 작아져 있습니다. 혹시 비슷한 순간을 겪어 보신 적 있으신가요. 꼭 창구만의 일도 아닙니다. 약국에서 "이 약, 보험 안 되는 거 아시죠?" 하는 말을 뒤에 선 사람들과 함께 듣게 될 때, 식당에서 할인 쿠폰을 내밀자 점원이 한 번 더 큰 소리로 확인할 때, 아이 학교에서 급식비 지원 대상을 따로 부를 때. 누가 저를 비난한 것도 아니고, 거친 말이 오간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 자리를 지나온 사람만 어쩐지 어깨가 조금 내려갑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우선, 그 직원은 나쁜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정해진 절차대로 빠짐없이 확인해야 했고, 어쩌면 하루에 같은 질문을 수십 번 반복하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무례하려는 마음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제가 느낀 그 작아짐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요.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라는 개념으로 이 물음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입니다. 그가 말하는 좋은 사회의 기준은 조금 뜻밖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얼마나 친절한가가 아니라,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가에 있다는 겁니다. 친절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음을 내어 채워 넣는 것입니다. 반면 모욕은, 종종 개인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제도의 생김새 안에 이미 들어가 있습니다. 다시 그 창구를 떠올려 보겠습니다. 칸막이가 없어 옆 사람에게 다 들리는 자리, 소득을 소리 내어 확인하도록 짜인 순서, 도움을 받으려면 내 형편의 바닥을 남들 앞에서...

내 이름 대신 '3번 환자분'이라 부를 때

병원 진료실 앞, 한참을 기다립니다. 문이 열리고 '3번 환자분, 들어오세요'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별생각 없이 일어나 들어가신 적, 혹시 있으신가요?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번호로 불리는 게 꼭 무례해서가 아닙니다. 바쁜 진료실에서 순서를 정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일 뿐이죠. 칸트는 사람을 대하는 두 가지 방식을 나눠 봤습니다. 누군가를 일을 처리하기 위한 '통과 지점'으로만 대하는가, 아니면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한 사람으로 대하는가. 칸트가 말한 목적의 정식이란, 사람을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로만 다루지 말고 언제나 그 사람 자체를 목적으로도 대하라는 이야기입니다. '3번'이라는 호명이 불편한 건, 그 한 글자 안에 제 이름도, 제가 왜 아픈지도, 제가 어떤 사람인지도 들어갈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잘못한 사람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그 시스템에는 '한 사람'이 들어설 칸이 처음부터 없었던 거죠. 저도 어제까진 그냥 번호에 맞춰 일어나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번 다시 보기 시작하니까, 제가 하루 중 얼마나 자주 '몇 번'으로 지나가고 있었는지가 보이더라고요. 오늘 하루, 무심코 번호로 불리고 번호로 지나간 순간 하나를 잠깐 낯설게 다시 봐보세요. 거기 '저'라는 사람이 들어설 자리가 있었는지. 오늘의 시선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목적의 정식 (인간성의 정식) · 사람을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언제나 그 사람 자체를 목적으로도 대하라는 도덕 원칙입니다. 이 시선을 더 들여다보고 싶다면 《도덕형이상학 정초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85) 우리가 옳다고 느끼는 도덕의 밑바닥에 어떤 원칙이 깔려 있는지를 끝까지 파고든 책으로, '사람을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라'는 그 유명한 ...

잘 먹었다는 말은 오가는데, 그 손은 어디에

명절 상이 거의 다 비워졌습니다. 여기저기서 "잘 먹었다", "오늘 음식 참 좋더라" 하는 말이 오갑니다. 다들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텔레비전 앞으로 흩어집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면, 그 흐뭇한 말들 사이에 끝내 나오지 않는 한 문장이 있습니다. "이거, 누가 다 차렸어?" 음식은 칭찬을 받는데, 그 음식을 차린 사람의 이름은 어디에서도 불리지 않습니다. 혹시 익숙한 장면 아니신가요. 꼭 명절 식탁만의 일도 아닙니다. 회식이 끝나고 "오늘 자리 좋았다"는 인사가 오갈 때, 정작 그 자리를 잡고 예약하고 인원을 맞춘 막내의 이름은 빠져 있습니다. 회의실의 깨끗한 화이트보드, 늘 채워져 있는 탕비실의 커피, 아침마다 정돈된 사무실 — 누리는 사람은 많은데, 그걸 매일 채워 놓은 손은 좀처럼 화제에 오르지 않습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잘 먹었다"는 분명 따뜻한 말입니다. 누구도 인색하게 군 게 아닙니다. 다만 그 칭찬은 '음식'을 향해 있지, '음식을 만든 사람'을 향해 있지 않습니다. 칭찬이 오가는 바로 그 자리에, 정작 그 일을 한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 겁니다. 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이 대목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이 사람으로 온전히 선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묻고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내가 한 일이 '내가 한 일'로 다른 사람들에게 되돌아올 때, 그때 비로소 나는 한 사람으로 선다고요. 그는 이걸 인정(Anerkennung)이라고 불렀습니다. 거창한 상찬이 아닙니다. 그저 "이건 당신이 한 일이군요" 하고 그 일을 한 사람을 한번 불러 세워 주는 것. 그 작은 되돌아옴이 빠지면, 일은 분명히 있었는데 그 일을 한 사람만 슬그머니 사라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누가 못되거나 무심해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