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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July, 2026

매일 사라지도록 되어 있는 일

저녁상이 차려집니다. 국에서는 아직 김이 오르고, 접시는 어제와 조금 다른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밥을 다 먹고 나면 그릇이 개수대로 옮겨지고, 물소리가 잠깐 나다가 그칩니다. 잠시 뒤 부엌은 아침에 보았던 모습으로 돌아가 있습니다. 방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자국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어느 집에서는 이런 말이 오갔다고 합니다. 하루 세 번 상을 차리고 그 사이사이 닦고 개어 두는 일에 대해 한마디를 건넸더니, 돌아온 대답이 "원래 하는 건데 뭘"이었다고요. 모질게 하려던 말은 아니었을 겁니다. 다만 그 말이 나오면 이야기는 거기서 접히고, 곧 다음 끼니 준비가 시작됩니다. 같은 대화가 하루에 몇 번이고 지나갑니다. 이런 장면이 유별난 집에만 있지도 않습니다. 며칠 앓고 일어났는데 집 안이 그대로 굴러가고 있던 아침, 늦게 들어와도 식탁에 덮여 있던 그릇. 되어 있는 것은 매일 만나는데, 그것이 누구의 손을 지나왔는지는 좀처럼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원래'라는 두 글자가 앉아 있는 자리 "원래 하는 건데 뭘"이라는 문장을 천천히 읽어 보면 빠진 것이 하나 눈에 들어옵니다.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가 무엇을 했다는 말이 들어설 자리에 '원래'라는 두 글자가 대신 들어앉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일은 사람이 한 일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런 상태였던 것처럼 들립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주인과 노예' 대목에서, 시키는 쪽이 아니라 실제로 손을 대는 쪽이 오히려 자기를 세우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어려운 말 같지만 이유는 단순합니다. 손을 댄 것은 세상에 남고, 남은 것은 만든 사람에게 되돌아와 '이건 내가 한 것'이라고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깎아 놓은 나무, 지어 놓은 집처럼요. 그런데 살림은 남지 않는 쪽으로 되어 있는 일입니다. 차린 밥은 먹혀서 없어지고, 닦은 바닥은 곧 다시 밟히고, 갠 옷은 다시 입혀져 흐트러집니다. 결과가 사라져야 제대로...

문 안쪽에서는 문이 보이지 않습니다

보조견 한 마리와 함께 매장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인사보다 먼저 "개는 안 됩니다"라는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실랑이는 없었습니다. 목소리가 커지지도 않았고, 설명이 오래 이어지지도 않았습니다. 들어서던 걸음이 방향만 바꾸어, 그대로 문 밖으로 나갔을 뿐입니다. 매장은 잠깐 어색했다가 곧 평소의 소리로 돌아갔을 겁니다. 계산대 벨 소리, 봉투 부스럭거리는 소리. 돌아선 쪽의 하루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저녁 찬거리를 다른 데서 구했는지, 그냥 집으로 향했는지. 그런 일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으니까요. 비슷한 장면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습니다. 들어가려다 돌아선 걸음, 물어보려다 삼킨 말. 큰 사건이 아니라서 뉴스가 되지도 않고, 사과를 받게 되지도 않는 장면들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른 자리에 서서 바라보고 싶습니다. 그날 그 입구에 서 있던 것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요. 보조견은 몇 년을 배웁니다. 수많은 훈련과 여러 번의 시험을 통과한 뒤에야 한 사람의 눈과 발이 되어 거리로 나옵니다. 그러니 그날 문 앞에 서 있던 것은 '손님과 개'가 아니었습니다. 오래 준비되어 이미 완성되어 있던, 한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하루를 건너가는 방식 그 자체였습니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이런 장면을 '역량'이라는 눈으로 다시 봅니다. 말은 낯설지만 뜻은 평이합니다. 사람에게 어떤 능력이 있다는 것과, 그 능력을 실제로 펼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라는 겁니다. 걸을 수 있어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없다면, 고를 수 있어도 진열대 앞까지 갈 수 없다면, 그 능력은 아직 그 사람의 자유가 된 것이 아닙니다. 능력은 사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세상이 맞물리는 자리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시선입니다. 이 눈으로 보면 그날 모자랐던 쪽이 어디였는지가 조금 다르게 드러납니다. 돌아선 분에게는 모자란 것이 없었습니다. 걸을 수 있었고, 고를 수 있었고, 계산할 수 있었습니다. 비어 있던 것...

쉰 시간을 흠이 아니라 삶으로

재취업을 준비하며 면접을 보러 가면, 대화가 순조롭게 흐르다가도 한 대목에서 공기가 살짝 달라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력서 위 어느 몇 달, 아무 소속도 적혀 있지 않은 그 빈 줄에 시선이 닿을 때입니다. "이 기간에는 뭘 하셨어요?" 하는 물음이 던져지고, 그때부터는 준비해 온 답을 말하기보다 그 몇 달을 자꾸 설명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런 자리에 한 번쯤 앉아 보신 분이라면, 그 미묘한 온도 차를 아마 기억하실 겁니다. 비슷한 장면은 면접장 바깥에도 있습니다. 병으로 한동안 쉬었다 돌아온 사람이 오랜만에 마주친 동료에게 안부 대신 "그동안 왜 안 보였어?"를 먼저 듣기도 하고, 아이를 키우느라 일을 멈췄던 사람이 모임에 나갔다가 "그 긴 시간 아깝지 않았어요?"라는 말에 머쓱해지기도 합니다. 누구도 언성을 높이지 않았고, 모진 말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돌아 나오는 발걸음은 어쩐지 조금 무거워집니다. 모욕은 늘 목소리를 높이지 않습니다 이 장면을 잠깐 다른 각도에 놓고 보겠습니다. 먼저 눈에 걸리는 건, 그 몇 달을 대하는 질문이 거의 언제나 '왜'로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왜'에 마련된 정답의 자리는 사실상 하나뿐입니다. 남들이 납득할 만한 사유를 대서, 비어 보이는 그 기간을 지워 내는 것. 아이를 돌봤든, 아팠든, 그저 다음 걸음을 고르느라 잠시 멈춰 섰든, 그 시간을 '한 사람이 어쨌든 살아 낸 시간'으로 그냥 적어 둘 칸은 그 질문 안에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은 좋은 사회를 재는 자를 조금 다른 데로 옮겨 보자고 했습니다. 흔히 우리는 얼마나 고르게 나눠 가졌는가로 사회의 됨됨이를 가늠하지만, 그는 '이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가'를 먼저 물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회를 '품위 있는 사회'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가 말한 '모욕'의 뜻...

이름이 아니면 채워지지 않는 자리

새로 들어간 일터에서, 손이 좀 느리다는 이유로 이름 대신 '1번' '2번'으로 불려 본 적 있으신지요. "어이, 2번!" 하는 소리에 어느새 고개부터 먼저 돌아갑니다. 처음에는 별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사람이 많은 현장에서 하나하나 이름을 외우기도 번거로우니, 그냥 부르기 편한 호칭인가 보다 하고 넘어갑니다. 그런데 이런 부름은 꼭 공사장이나 주방 같은 곳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콜센터에서 '상담원 몇 번'으로, 앱 화면 속 '기사님'이라는 이름 없는 이름으로, 병원 대기실에서 '3번 환자분'으로 불리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부르는 쪽에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불리는 쪽이 크게 상처받는 것도 아닙니다. 다들 그러려니 하고 하루가 지나갑니다. 번호는 채워져도, 이름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부르기 편함'을 조금만 더 따라가 보면, 묘한 지점이 하나 드러납니다. 번호에는 이름과 다른 성질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그 자리에 선 사람이 그만두면, 내일 다른 사람이 와서 똑같이 '1번'이 됩니다. 사람이 바뀌어도 번호는 그대로 남습니다. 그런데 이름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이 아니면 채워지지 않는, 세상에 딱 한 자리를 가리킵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사람을 대하는 두 가지 방식을 갈라서 보았습니다. 하나는 필요한 일을 시키기 위한 수단으로'만' 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으로도 바꿔 끼울 수 없는, 그 자체로 목적인 존재로 대하는 것입니다. 칸트는 물건에는 값이 매겨져 다른 것과 바꿀 수 있지만 사람에게는 값이 아니라 존엄이 있어서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도구로 쓰는 건 살면서 어쩔 수 없다 해도, 도구로'만'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 눈으로 다시 보면, 번호로만 불리는 그 자리에 비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그건 그 사람의 능력이나 참을성 같은 게...

이름 없이 떠다니는 생각들

회의가 한창 이어지던 중에 누군가 한 가지 의견을 냅니다. 방 안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끄덕여지고, 좋은 얘기네요, 하는 말도 몇 마디 붙습니다. 그런데 그 의견이 어쩐지 낯익습니다. 며칠 전 복도에서, 혹은 점심을 먹다가 지나가듯 먼저 꺼냈던 바로 그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그거 제가 먼저 했던 생각인데요' 한마디가 목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조용히 가라앉습니다. 삼킨 이유가 조금 묘합니다. 겁이 나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한마디를 꺼내는 순간, 왠지 제가 쪼잔한 사람이 될 것 같아서였습니다. 이런 순간, 꼭 회의실이 아니어도 한 번쯤 겪어 보셨을지 모릅니다. 가족 단톡방에 흘리듯 올린 아이디어가 며칠 뒤 다른 사람 입에서 근사한 계획이 되어 돌아오고, 오래 준비한 제안이 여러 손을 거치는 사이 처음 낸 사람의 이름만 슬그머니 지워지는 자리 말입니다. 대답이 아니라,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눈에 걸리는 건, 분명 좋은 생각을 냈는데 정작 그걸 '내 것'이라 밝히는 쪽이 옹졸한 사람이 된다는 점입니다. 왜 이런 뒤집힘이 생기는 걸까요.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인정이라는 것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았습니다. 내가 한 일은 나 혼자 마음속으로 알고 있다고 해서 내 것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말을 주고받는 자리에서 누군가 '그건 저 사람이 낸 것'이라고 짚어 줄 때, 비로소 그 일이 내 것으로 선다고 보았습니다. 인정은 혼자 품고 있는 감정이 아니라, 여럿이 주고받는 자리에서 생기는 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눈으로 회의실을 보면, 비어 있는 것이 그 사람의 용기가 아니라는 게 드러납니다. 낸 사람과 낸 것을, 아무 다툼 없이 한 번 이어 줄 확인. 그 확인이 놓일 칸이 애초에 없는 겁니다. 안건을 올리고 검토하고 결정하는 순서는 꽤 촘촘히 갖춰져 있는데, '이 생각은 처음 누구에게서 나왔나'를 가볍게 적어 둘 칸만은 어느 순서에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이디어는 주인 없이 떠다니다 ...

제안이 끝나기 전에 돌아온 대답

회의가 한창일 때, 누군가 조심스럽게 손을 듭니다. 이 부분은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답이 돌아옵니다. 그냥 원래 하던 대로 합시다. 반 박자 빠른 그 대답을, 아마 한 번쯤 들어 보셨을 겁니다. 큰 언쟁이 벌어진 것도 아니고, 누가 언성을 높인 것도 아닙니다. 회의는 그대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갑니다. 꼭 회의실 안에서만 있는 일도 아닙니다. 오래 굴러온 가게의 주방에서 새로 온 사람이 순서를 한번 바꿔 보자고 하면, 늘 하던 대로 하라는 말이 먼저 옵니다. 몇 년째 같은 양식을 쓰는 부서에서 누군가 서식을 손보자고 하면, 쓰던 걸 쓰자는 답이 돌아옵니다. 어디서도 규칙을 어긴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꺼내진 방법 하나가, 놓이자마자 조용히 접힙니다. 대답이 제안보다 빨랐다는 것 이 장면에서 먼저 눈에 걸리는 건 대답의 내용이 아니라 속도입니다. 대답이 제안보다 빨랐다는 건, 그 제안이 끝까지 들린 적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하자는 말인지 확인되기도 전에 자리는 이미 닫혀 있었던 셈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갈리는 건 좋은 방법이냐 나쁜 방법이냐가 아닙니다. 그 방법이 좋은지 나쁜지 알아볼 시간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으니까요.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은 사람에게 중요한 건 무엇을 할 줄 아느냐만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 능력을 실제로 써 볼 기회가 열려 있느냐, 거기까지가 한 사람의 자유라는 겁니다. 할 줄 아는 것과, 그것을 해 봐도 되는 자리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품고 있어도 그것을 꺼내 볼 통로가 막혀 있다면, 그 능력은 있으나 없으나 크게 다르지 않게 됩니다. 센이 보기에 자유란 마음속에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바깥에서 펼쳐질 자리가 있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이 눈으로 회의실을 다시 보면 비어 있는 것이 하나 드러납니다. 그 방에는 결정하는 절차가 꽤 갖춰져 있습니다. 안건을 올리는 법, 검토하는 법, 반려하고 다시 올리는 법까지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검증되지 않은 방법...

회의실 쓰는 법은 첫 주에 배웠습니다

회의가 절반쯤 지났을 무렵의 일입니다. 스테이플러 하나로 묶인 기획안 한 부가 책상 위를 미끄러지다가, 누군가의 노트북 앞에서 멈춥니다. 큰 소리가 나지도 않았습니다. 딱 그만큼의 소리였습니다. 그 위로 말 한마디가 얹힙니다.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그 회의실에는 그 시간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다 있었고, 그러니까 그 장면도 다 봤습니다. 꼭 종이가 날아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방에서는 접시가 조리대에 소리 나게 놓이고, 매장 조회 시간에는 유독 한 사람 이름만 여러 번 불립니다. 그 몇 초에는 대개 따로 붙는 이름이 없습니다. 회의였고, 조회였고, 지적이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몇 초가 지나가면 대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회의는 멈추지 않습니다. 아직 다뤄야 할 것이 남아 있으니까요. 그 솜씨는 어디서 배우는 걸까요 그 회의에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안건이 있고, 발표가 있고, 검토가 있고, 결정이 있습니다. 종이가 날아간 뒤에도 그 순서는 흐트러짐 없이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눈여겨볼 것은 오히려 그 순조로움입니다. 방금 한 사람이 여러 사람 앞에서 낮춰졌는데, 회의의 순서는 그것을 하나의 일로 치지 않습니다. 그런 항목이 애초에 들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함께 일하는 일을 '기술'이라고 불렀습니다. 타고난 성품이 아니라, 목수의 손놀림이나 악기를 다루는 솜씨처럼 익혀야 몸에 붙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는 일, 반대하면서도 상대를 밀어내지 않는 문장을 고르는 일. 사람이 여럿 모이기만 하면 저절로 생겨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배우지 않으면 늘지 않고, 쓰지 않으면 무뎌지는 솜씨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눈으로 회의실을 다시 보면 빠진 것이 하나 드러납니다. 그 방에는 평가하는 절차가 꽤 정교하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기획안을 어떤 기준으로 볼지, 누가 결재하는지, 반려되면 며칠 안에 다시 올려야 하는지까지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평가를 사람에게 건네는 방식은 어느 문...

메모는 정확했는데, 저를 마주 볼 자리만 비어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진료 안내문을 받아 들었을 때의 일입니다. 다음 예약이 언제인지, 무엇을 준비해 오라는지가 적힌 평범한 종이였는데, 맨 아래쪽에 지우다 만 손글씨 한 줄이 남아 있었습니다. 저에게 하는 안내가 아니라, 담당자들끼리 저를 두고 주고받은 짧은 메모였습니다. 다음 사람에게 일을 넘기며 저를 몇 글자로 줄여 적어 둔 말이었죠. 무심코 그 한 줄을 읽어 버린 순간, 이상하게 얼굴이 조금 화끈거렸습니다. 비슷한 일은 생각보다 여러 곳에 있습니다. 민원 서류 귀퉁이에 남은 처리 메모, 택배 송장에 붙은 배송 기사끼리의 쪽지, 상담을 마치고 받아 든 서류 뒤에 미처 떼지 못한 접착 메모. 저에게 건네려던 글이 아니라, 저를 사이에 두고 오간 말이 실수로 제 손까지 따라온 경우들입니다. 혹시 이런 종이 한 장을, 어딘가에서 마주치신 적 있으신가요? 그 한 줄을 읽고 나면, 화가 나기 전에 먼저 묘한 기분이 듭니다. 험한 말이 적혀 있어서가 아닙니다. 정중한 말이든 사무적인 말이든, 그 문장은 처음부터 제가 읽을 것을 염두에 두고 쓰이지 않았다는 사실 — 그게 오래 남습니다. 그 메모는 저를 지나쳐 다른 곳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놓아 보겠습니다. 지우려다 만 그 한 줄은, 정작 그걸 받아 든 사람이 아니라 그 곁의 누군가를 바라보며 쓰였습니다. 저에게 건네는 안내가 아니라, 옆자리 동료가 읽고 다음 일을 이어 가도록 저를 '어떤 건'으로 줄여 적어 둔 기록이니까요. 겨냥한 눈이 처음부터 제가 아니었던 겁니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사람이 사람을 마주하는 방식을 두 가지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하나는 그가 '나-너'라고 부른 자리입니다. 눈을 맞추고, 말을 건네고, 상대를 마주 선 한 사람으로 대하는 자리입니다. 다른 하나는 '나-그것'이라 부른 자리입니다. 상대를 처리하고 분류해 다음으로 넘겨두는 자리, 필요한 만큼만 다루고 나머지는 접어 두는 자리입니다. 그는 사람을 오직 '그것...

책상은 첫날 나왔는데, 부르는 일에는 담당자가 없었습니다

새 사람이 오는 날, 사무실은 꽤 분주합니다. 자리를 닦고, 의자를 하나 더 들이고, 사원증을 만들고, 계정을 열어 줍니다. 급여 계좌를 등록하고, 조직도에 이름을 올리고, 단체 메일 주소록에 한 줄을 추가합니다. 첫날에 해야 할 일은 목록으로 정리되어 있고, 목록의 항목마다 처리할 사람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첫날은 대체로 무사히 지나갑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한 달쯤 지난 어느 정오, 열두 시가 되면 여기저기서 의자 미는 소리가 납니다. 지갑을 챙기는 소리, 오늘 뭐 먹지, 하는 소리. 사람들이 우르르 나가고 나면 사무실에는 한 사람이 남습니다. 조금 뒤에는 회의 소집 알림이 돌지만, 그 알림도 어쩐지 그 한 사람만 비껴갑니다. 규정 위반은 하나도 없습니다. 서류상으로는 모든 것이 정상입니다. 이 장면이 신입 사원만의 것은 아닙니다. 부서를 옮겨 온 사람이 같은 층에 앉아 있는데도 회식 공지 단체방에는 들어 있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같은 사무실에서 매일 함께 일하지만 소속이 다르다는 이유로 명단의 어느 칸에도 잡히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쪽도 누가 밀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 사람을 세는 칸이 없었을 뿐입니다. 없었던 것은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사람이 한 사람으로 서는 방식에 대해 이렇게 보았습니다. 우리는 혼자 힘으로 자기가 누구인지를 세우지 못합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함께 무언가를 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여 줄 때에야 비로소 온전한 한 사람으로 섭니다. 그는 이것을 인정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려운 말처럼 들리지만 뜻은 소박합니다. 사람은 남들이 자기를 한몫하는 사람으로 세어 줄 때 자기 자신으로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눈으로 정오의 사무실을 들여다보면, 이상한 것이 하나 보입니다. 그 사람을 이 공간에 들이기 위한 절차는 첫날에 이미 완결되었습니다. 책상, 계정, 계좌, 조직도. 하나하나 담당자가 있었고, 하나하나 처리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일 에...

닫는 말 다음에, 아직 발음되지 않은 문장

진로 이야기가 나오는 자리는 대체로 조용합니다. 밥을 먹다가, 성적표를 들여다보다가, 혹은 아무 예고 없이 누군가 묻습니다. 뭐 하고 싶은데. 그러면 오래 접어 두었던 문장 하나를 조심스럽게 펴 보게 됩니다. 저는 이런 걸 해 보고 싶어요. 돌아오는 대답은 대체로 짧습니다. 그건 돈이 안 돼. 다섯 글자면 충분합니다. 꺼내는 데는 몇 달이 걸렸는데 접히는 데는 3초가 걸리지 않습니다. 이 장면이 열일곱의 것만은 아닙니다. 서른의 식탁에서도, 마흔의 술자리에서도 같은 문장이 놓입니다. 그거 해서 뭐 먹고살려고. 요즘 그 바닥 어렵다던데. 그 말을 한 사람에게 악의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대개는 걱정이었고, 어쩌면 절반쯤은 사실이었을 겁니다. 그 다섯 글자 뒤에 무엇이 있었나 마사 누스바움은 사람의 '할 수 있음'을 두 겹으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한 겹은 그 사람 안에 자라난 능력입니다. 손끝의 감각, 오래 앉아 있는 집중, 남들이 지나치는 것을 알아보는 눈 같은 것들. 다른 한 겹은 그 능력이 바깥으로 나갈 문이 열려 있는가입니다. 배울 곳이 있는가, 발을 들일 입구가 있는가, 그 일을 하며 살아갈 통로가 뚫려 있는가. 누스바움은 이 둘이 맞물릴 때에만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정말로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문이 닫혀 있으면 안쪽의 능력은 아무 일도 일으키지 못한 채, 있었는지조차 모르게 지나가 버립니다. 이 눈으로 그 저녁의 식탁을 보면, '그건 돈이 안 돼'는 바깥에 관한 정보처럼 들립니다. 실제로 정보이기도 합니다. 그 말이 틀렸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정보로 놓이지 않고 결론으로 놓였다는 점이 눈에 걸립니다. 왜냐하면 그 말 뒤에는 아직 한 번도 발음되지 않은 문장들이 통째로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길에서는 무엇을 배웁니까. 어디에서 시작합니까.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무엇으로 먹고삽니까. 통로가 좁다면 얼마나 좁고, 좁은 대로 걷는 사람들은 어떻게 걷습니까. 이 중 어느 하나도 식...

벽에 붙은 종이 한 장이 지나온 길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탑니다. 문이 닫히고, 층수 버튼 위로 눈이 올라갑니다. 그 옆 벽에 A4 한 장이 붙어 있습니다. 코팅도 하지 않은 흰 종이에, 반듯한 인쇄체. 입주민 민원 한 줄이 그대로 옮겨 적혀 있습니다. 청소하시는 분과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기가 불편하다는 내용입니다. 그 아래에는 관리사무소의 답변이 이어집니다. 문장은 정중하고, 오탈자도 없고, 종이는 네 귀퉁이가 테이프로 단정하게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엘리베이터는, 오늘도 그 글에 적힌 분이 타고 오르내립니다. 밀대와 양동이를 들고, 층마다 문이 열릴 때마다 한쪽으로 비켜서면서. 비슷한 종이를 다른 곳에서도 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상가 화장실 문 안쪽, 청소 시간에는 이용을 자제해 달라는 안내문 밑에 누가 볼펜으로 눌러 쓴 한 줄. 사무실 탕비실, 커피머신 옆 정리 안내문 아래 덧붙은 문장. 처음에는 그저 안내문이려니 하고 지나갑니다. 그런데 잠깐 멈춰 서서 보면, 그 문장이 향하는 사람이 대개 그 자리에 매일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이 장면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따라가 보겠습니다. 그 종이가 벽에 닿기까지, 문장은 여러 번 옮겨 적혔습니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짧은 불평이었을 겁니다. 그것이 민원 접수 서식의 칸을 채웁니다. 서식은 답변서로 넘어가고, 답변서는 프린터를 통과하고, 인쇄된 종이는 게시 담당자의 손에 들려 엘리베이터 벽으로 갑니다. 옮겨질 때마다 그 문장은 조금씩 더 공적인 것이 됩니다. 사적인 짜증이 접수번호를 얻고, 접수번호가 공문서의 형식을 얻고, 공문서가 마침내 벽이라는 자리를 얻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그 긴 경로의 어느 지점에도 이런 확인이 놓여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 문장이 가리키는 사람도 이 엘리베이터를 매일 탄다는 사실 말입니다. 서식은 무엇이 불편한지를 묻습니다. 언제, 어디서, 얼마나 자주 불편한지도 묻습니다. 그러나 그 불편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그 사람이 이 종이를 읽게 될지는 어느 칸에서도 묻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철학자...

끝을 정하는 자리

퇴근 시각이 지난 사무실에 불이 몇 칸만 남아 있습니다. 수화기를 든 사람은 아직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저쪽의 말은 좀처럼 끝나지 않고, 이쪽에서는 먼저 끊을 수가 없습니다. 화가 난 목소리도 아니고, 대단한 사건도 아닙니다. 그저 말이 길어졌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이 통화는 끝나지 않습니다. 응대 규정에 '먼저 끊지 말 것'이라고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어딘가에서 한 번쯤 스쳐 보셨을 저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문 닫을 시각이 지난 매장에서, 마지막 손님의 이야기가 길어지는 동안 셔터를 반쯤 내린 채 서 있던 사람. 상담이 끝났는데도 학부모의 전화가 이어져 교무실에 혼자 남아 있던 선생님. 창구가 닫힌 뒤에도 민원인의 말을 끝까지 받아 적던 손. 장면은 저마다 다르지만, 자리를 뜨지 못하는 이유가 상대에게 있지 않다는 점은 닮아 있습니다. 매뉴얼이 적어 두지 않은 문장 이 통화를 붙들고 있는 것은 수화기 너머의 말이 아닙니다. 먼저 끊지 말라는 규정의 한 줄입니다. 응대 매뉴얼은 놀랍도록 촘촘합니다. 첫인사의 문장, 목소리의 높이, 사과를 건네는 순서, 통화를 마치는 인사말까지 전부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촘촘한 문서 어디에도 '이 통화를 언제 끝내도 되는지'는 적혀 있지 않습니다. 시작하는 법은 있는데, 멈춰도 된다는 허락이 없습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사람을 한낱 수단으로만 다루지 말고 언제나 목적으로도 대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자주 놓치는 대목이 있습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쓰는 일 자체를 금지한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수단이 되며 삽니다. 상담원은 회사에 필요한 손이고, 저는 누군가의 노동에 기대어 하루를 삽니다. 칸트가 그은 선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무언가를 얻어 내기 위해 '거쳐 가는 통로'로만 쓰지 말라는 것. 통로에는 사정이 없고, 저녁이 없고,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통로는 그저 열려 있으면 됩니다. 그렇게 보면 이 저녁의 문제가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응대 시간은 초 ...

회의록에 없는 칸 하나

두 시간짜리 회의였습니다. 한쪽이 말하면 그 말을 건네고, 다른 쪽이 답하면 그 답을 되돌려 놓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했습니다. 회의는 무사히 끝났고, 며칠 뒤 회의록이 메일로 도착합니다. 일시, 장소, 참석자, 발언 요약. 빠진 것 없이 깔끔한 문서입니다. 다만 그 두 시간 동안 말을 옮긴 사람 이야기는 한 줄도 없습니다. 이런 문서는 생각보다 자주 도착합니다. 행사가 끝나고 올라온 사진에는 무대 위 사람들만 있고, 시작 전부터 의자를 나르고 마이크를 시험하던 사람들은 프레임 바깥에 있습니다. 누가 이름을 지운 것도, 몰래 가로챈 것도 아닙니다. 문서는 정해진 대로 정직하게 채워졌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는 화를 낼 대상을 찾기가 오히려 어렵습니다. 회의록을 쓴 사람은 양식을 따랐고, 그 양식은 오래전부터 그 모양이었으니까요. 그런데도 무언가 조금 어긋나 있습니다. 그 어긋남이 어디에서 오는지, 문서를 처음부터 다시 펼쳐 봅니다. 이름이 아니라, 이름이 놓일 자리 회의록을 위에서 아래로 훑으면 칸이 넷입니다. 일시, 장소, 참석자, 발언. 빠진 것이 이름 하나뿐이라면 다음번에 한 줄 적어 넣으면 그만일 겁니다. 그런데 넷 어디에도 그 이름을 적어 넣을 곳이 없습니다. 참석자 칸에 넣자니 그는 자기 말을 하러 온 사람이 아니고, 발언 칸에 넣자니 그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부 남의 말이었습니다. 헤겔은 사람이 혼자서는 자기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흔히 '주인과 노예'라 불리는 대목에서 그는,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볼 때에야 비로소 각자가 사람으로 선다고 말합니다. 알아봄이 한쪽으로만 흐르면 그 알아봄은 반쪽이 됩니다. 한쪽은 상대를 사람으로 세워 주는데 정작 자기는 누구에게도 그렇게 세워지지 않는다면, 거기 남는 것은 사람 둘이 아니라 사람 하나와 도구 하나가 되는 셈이지요. 그 눈으로 회의를 되짚어 보면, 그날 두 편은 분명히 서로를 알아봤습니다. 상대의 사정을 이해했고, 표정을 읽었고, 끝에는 악수를 했습니다. 다만...

먼저 여쭙는 반 박자

길을 걷다 보면 이런 장면을 지나칠 때가 있습니다. 휠체어를 탄 분이 앞서 가고, 그 뒤로 누군가 다가가 말없이 손잡이를 잡습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 한마디가 채 끝나기도 전에 바퀴는 이미 앞으로 굴러가고 있습니다. 누구를 탓할 장면은 아닙니다. 오히려 도우려는 따뜻한 마음에서 나온,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모습이지요. 비슷한 장면은 생각보다 여러 곳에 있습니다. 횡단보도 앞에서 머뭇거리는 어르신의 팔을 얼른 붙들어 길을 건네 드릴 때, 지팡이를 짚은 분의 팔꿈치를 슬쩍 잡아 방향을 돌려 드릴 때, 지도를 들여다보는 여행자에게 다가가 앞장서서 길을 안내할 때. 하나같이 선의에서 나온 손길입니다. 그런데 그 손길들에는 묘하게 닮은 구석이 하나 있습니다. 도움이 먼저 움직이고, 물음은 그 뒤를 따라오거나 아예 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장면을 서둘러 누군가의 무례로 정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손을 내민 사람은 정말로 돕고 싶었을 테니까요. 다만 그 선의가 지나간 자리에 무엇이 남고 무엇이 빠졌는지, 잠깐 천천히 들여다보려 합니다. 손이 닿기 전에 놓였어야 할 한마디 손잡이를 잡은 손이 이미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정작 그 손이 닿기 전에 놓였어야 할 한마디가 이 장면엔 통째로 비어 있습니다. '이대로 가도 괜찮을까요' 하고 먼저 여쭙는, 그 반 박자짜리 물음입니다.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은 한 사람의 삶을 두 개의 축으로 나눠 보았습니다. 하나는 무엇이 이루어졌는가 — 앞으로 나아갔다는 결과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일을 스스로 고르고 해냈는가, 곧 자기 삶의 주인으로 그 자리에 있었는가입니다. 센은 이 두 번째 자유, 그러니까 '스스로 할지 말지를 정할 수 있음'을 존엄이 놓이는 자리로 보았습니다. 좋은 결과를 받아 드는 것과, 그 일을 내가 골랐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이야기라는 거지요. 그 눈으로 다시 보면 방금 그 손길은 목적지까지 분명 데려다주었지만, 그곳으로 갈지 말지·어떻게 갈지를 고를 한 자리를 소...

귀를 가려 주는 선은 아직 없습니다

번호표를 손에 쥐고 순서를 기다립니다. 전광판에 번호가 뜨고, 창구 앞 의자에 앉아 챙겨 온 서류를 밀어 넣습니다. 직원이 종이를 몇 장 넘겨 보다가 고개를 듭니다. '소득이 이게 전부예요?' 특별히 큰 목소리도 아니었는데, 그 물음은 뒤에 선 사람들에게까지 가 닿습니다. 줄이 잠깐 조용해집니다. 이런 조용함은 행정 창구에만 있지 않습니다. 약국 계산대에서 약 이름을 한 번 더 확인해 줄 때, 병원 접수대에서 어느 과에 가시느냐고 되물어 올 때, 상담 창구에서 어떤 사정으로 오셨는지 다시 말씀해 달라고 할 때. 묻는 쪽에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확인이 필요한 물음들입니다. 그런데 그 물음이 지나간 자리에는 매번 비슷한 종류의 조용함이 남습니다. 대답한 사람은 잠깐 어깨가 좁아지고, 들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휴대폰을 내려다봅니다. 이 장면을 서둘러 누군가의 잘못으로 정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조용함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잠깐 발밑을 들여다보려 합니다. 발밑에 그어진 한 줄 그 발밑에는 노란 테이프가 한 줄 그어져 있습니다. 다음 분은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라는 표시입니다. 앞사람의 서류가 뒷사람 눈에 들어오지 않도록 한 걸음의 거리를 만들어 두는 선이지요. 이 선은 저절로 생기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회의에서 그 필요를 말했고, 지침 문장을 다듬었고, 무릎을 굽혀 바닥에 테이프를 붙였을 겁니다. 화면을 돌려놓으라는 규칙도, 서류를 엎어 두라는 안내도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도움을 주고받는 자리를 오래 들여다본 사람입니다. 그가 존중이라고 부른 것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따뜻한 마음씨와는 결이 조금 다릅니다. 그의 눈길은 마음의 온도보다 자리의 짜임새 쪽에 가 있었습니다. 도움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은 애초에 나란한 높이에 서 있지 않습니다. 그 기울어진 자리에서도 받는 쪽이 깎여 나가지 않으려면, 누군가의 선의가 하필 그날 넉넉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존중은 그러니까,...

자리를 채우러 갔다가, 자리가 되어 돌아온 저녁

행사에 사람이 조금 부족하다는 연락이 옵니다. 자리를 채워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부탁을 받고 나가서, 시키는 대로 앉고 박수를 치고 단체 사진에도 함께 섭니다. 그러다 행사가 끝나면 "이제 가셔도 됩니다"라는 말이 돌아오고, 참석자 명단에서는 이름 한 줄이 조용히 지워집니다. 이런 장면은 생각보다 여러 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정족수가 모자란다며 앉아만 있어 달라던 회의, 사진 한 컷을 위해 잠깐 끼어 달라던 자리, 급하다며 이름을 빌려 갔다가 일이 정리되면 소식이 뜸해지는 모임. 부를 때는 "꼭 좀 와 달라"였는데, 필요한 만큼 다 채워지고 나면 굳이 남아 있을 이유가 사라지는 자리들 말입니다. 섣부른 해석은 잠시 접어 두고, 이 저녁의 장면을 조금 천천히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다 채워지는 순간 사라지도록 놓인 자리 먼저 눈에 걸리는 것은 순서입니다. "가셔도 된다"는 말이 나온 때가 하필 머릿수가 다 채워진 바로 다음이라는 것. 그 전에는 들리지 않던 말이, 채움이 끝나는 순간 나옵니다. 시작과 끝을 정한 것이 그 사람의 사정이 아니라 자리가 다 찼느냐 아니냐였다는 뜻입니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두 결로 나눠 보았습니다. 하나는 마주 선 상대를 그 자체로 만나는 관계, 다른 하나는 상대를 어딘가에 쓸 도구로 대하는 관계입니다. 그는 앞의 것을 '나-너', 뒤의 것을 '나-그것'이라 불렀습니다. 말은 어렵게 들려도 속뜻은 단순합니다. 누군가를 '무엇에 쓸 사람'으로 대하기 시작하면, 그 쓸 일이 끝나는 바로 그때 관계도 함께 끝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결을 겹쳐 놓고 보면, 저녁의 장면에서 비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 또렷해집니다. 모자란 건 고맙다는 인사나 약간의 사례비가 아닙니다. 명단에는 '머릿수를 채울 칸'은 잘 마련되어 있었지만, '와 준 사람이 남을 칸'은 처음부터 놓여 있지 않았다는 것 — ...

정년이 그의 자리를 비우기 한참 전에, 그를 찾던 물음이 먼저 떠났습니다

한때는 뭐 하나 막히면 사람들이 제일 먼저 찾던 이가 있습니다. 신입이 조심스레 다가와 묻고, 옆 부서에서 전화가 오고, 급할 땐 윗사람까지 슬쩍 자리로 건너와 “이거 어떻게 하는 거였죠” 하고 물었지요. 그의 손을 거쳐야 일이 매듭지어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정년이 가까워진 그의 하루는 조금 다릅니다. 아침에 앉아 저녁에 일어설 때까지, 누구도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생깁니다. 혹시 이런 조용함을, 어느 자리에선가 한 번쯤 곁에서 본 적 있으신가요? 비단 오래 일한 사람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사를 자주 다녀 이제 동네 지리를 훤히 아는 이에게 아무도 길을 묻지 않을 때, 평생 살림을 도맡아 온 어른이 “요즘은 뭐 여쭤볼 게 있어야지” 하는 말을 들을 때, 한 분야를 오래 지켜 온 사람이 회의 테이블 한쪽에서 조용히 앉아만 있다 나올 때. 우리는 무언가를 크게 빼앗기는 장면만 서러운 줄 알지만, 사실 더 자주 겪는 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 고요 쪽입니다. 대개 우리는 이런 조용함을 그냥 ‘이제 좀 한가하신가 보다’ 하고 지나칩니다. 나이가 들면 자연히 그렇게 되는 거라고, 세월이 그런 거라고요. 그런데 오늘은 이 조용함을, 세월 탓으로 접어 두기 전에 한 걸음 떨어져서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정작 줄어든 것은 그의 앎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묻는다는 건, 곰곰이 보면 작은 신호 하나를 건네는 일입니다. ‘당신은 아직 뭘 아는 사람’이라는 신호요. 그래서 물음이 오간다는 건 단순히 정보를 주고받는 일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아직 이 일의 한 사람’으로 확인해 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이런 되비침을 ‘인정(Anerkennung)’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람이 한 일이 ‘그 사람이 한 일’로 다시 그에게 돌아올 때, 그때 비로소 사람이 사람으로 선다는 겁니다. 이 눈으로 다시 보면, 그의 하루가 조용해진 이유가 조금 다르게 잡힙니다. 정작 줄어든 건 그의 앎도, 그의 능력도 아...

밥 한 끼를 '할 수 있다'는 것

모처럼 밖에서 밥 한 끼를 하려고, 곁을 도와주는 분과 함께 식당 문을 엽니다.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펼치는데, "여기는 한 분당 메뉴 하나씩은 주문하셔야 합니다"라는 말이 돌아옵니다. 같이 온 그분 몫까지요. 주문을 하려던 손이 잠깐 허공에서 멈춥니다. 비슷한 장면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어르신을 모시고 병원에 다녀오는 길, 근처 식당에 잠깐 들른 보호자. 앞이 잘 안 보이는 친구의 팔을 잡고 카페에 함께 앉은 사람. 한쪽은 정말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러 왔고, 다른 한쪽은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곁에 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 앞의 규칙은 이 둘을 똑같이 '한 사람'으로 셉니다. 일단은 해석을 접어 두고, 이 장면을 조금 천천히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규칙이 세지 못한 자리 규칙이 헤아리는 것은 자리에 앉은 사람의 수입니다. 앉은 사람이 둘이면 메뉴도 둘 — 여기까지는 딱히 어긋난 데가 없어 보입니다. 다만 그 둘의 결이 서로 다르다는 데서 이야기가 갈립니다. 한 사람은 먹으러 왔고, 다른 한 사람은 그 한 사람의 외출을 여는 조건으로 그 자리에 있습니다. 같은 의자에 앉아 있어도, 한쪽은 손님이고 한쪽은 그 손님이 손님일 수 있게 만드는 '곁'인 셈이죠. 마사 누스바움은 존엄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봅니다. 무엇을 해도 좋다는 허락이 아니라, 그 일을 실제로 해낼 수 있느냐 — 그 실질적인 자유에 존엄이 있다고요. 식당에 들어와도 된다는 허락과, 정말로 밥 한 끼를 편히 할 수 있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이야기입니다. 뒤엣것이 이루어지려면 곁에서 문을 열어 주고, 자리를 봐 주고, 필요한 손을 보태 주는 '도움'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 도움은 밥 한 끼를 '할 수 있음'을 떠받치는 조건입니다. 그런데 방금의 규칙에는 이 조건을 놓을 칸이 없습니다. 규칙이 아는 것은 '앉은 사람'과 '시킨 메뉴'뿐이라, 한 사람의 외출을 여는 도움조차 그...

인사보다 먼저 도착한 반말

가게 문이 열리고, 처음 보는 손님이 들어섭니다.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말이 먼저 도착합니다. “이거 얼마야. 빨리 좀 해봐.” 인사도, 이름도, 서로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오가기 전인데, 그 짧은 한마디에는 이미 누가 위이고 누가 아래인지가 정해져 있습니다. 카운터 안쪽에서 일해 보신 분이라면, 이 말투를 어디선가 한 번쯤 받아 보셨을 겁니다. 장소만 바꾸면 비슷한 장면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민원 창구 앞에 번호표를 뽑고 앉은 사람에게, 담당자가 첫마디부터 말을 툭 내려놓는 자리. 배달 기사가 문 앞에 섰을 때, 문을 연 쪽이 대뜸 하대부터 시작하는 자리. 상담원의 안내가 채 끝나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에서 반말이 먼저 튀어나오는 자리. 상황은 제각각인데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말의 높낮이가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 가기도 전에 이미 정해져 있다는 점입니다. 흔히 이런 장면은 ‘무례한 사람 하나 잘못 만났다’로 정리되고 지나갑니다. 그렇게 넘기면 마음은 조금 편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장면을 조금만 다르게, 천천히 들여다보려 합니다. 말의 높낮이는 어디서 왔을까 반말은 원래 사이가 어느 정도 가까워진 다음에야 나오는 말입니다. 오래 알고 지냈거나, 서로 그렇게 부르기로 은근히 합의했거나. 그런데 방금 그 장면에는 그 과정이 통째로 빠져 있습니다. 처음 본 사이인데, 인사보다 반말이 먼저 나왔으니까요. 그렇다면 그 말의 높낮이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상대의 나이와 옷차림과 앉은 자리를 슬쩍 훑고서 ‘이 정도 사람이면 낮춰도 되겠다’고 먼저 셈해 둔 결과에 가깝습니다. 이스라엘의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은 이런 장면을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사회의 됨됨이 쪽에서 바라봤습니다. 그는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를 ‘품위 있는 사회’라고 불렀습니다. 눈여겨볼 대목은, 그가 구성원 하나하나가 착하냐를 묻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원래 어떤 날은 친절하고 어떤 날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개인의 선의 대신, 그 사회의 ...

덜어 준다는 말이 가져간 것

회의실에서든 현장에서든, 어떤 자리에는 웃으며 건네는 정해진 대사가 하나 있다고 합니다. “넌 그냥 머릿수만 채우면 돼. 생각은 윗선에서 할 테니까.” 가볍게, 농담처럼 던지는 말이라 듣는 쪽도 대개 그냥 따라 웃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웃고 돌아선 저녁이면,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조금 헛헛해지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같은 대사는 자리를 바꿔 가며 반복됩니다. 갓 들어온 사람에게 “괜히 머리 굴리지 말고 시키는 것만 잘하면 돼”라고 일러 두는 자리, 정해진 순서대로 손만 움직이면 되는 자리, 무언가 물어보면 “그건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라는 답이 돌아오는 자리. 장면은 제각각이어도 안에 담긴 말은 닮아 있습니다. 몸은 여기 있어라, 다만 생각은 두고 오라는 것입니다. 묘한 건, 그 말이 처음엔 오히려 편하게 들린다는 점입니다. 정할 것도, 책임질 것도 없이 그저 채우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그 편안함 뒤에 왜 자꾸 헛헛함이 따라붙는지는, 저도 한참 뒤에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습니다. 몸은 남기고 생각은 가져가는 셈법 이 대사를 조금 천천히 뜯어보면, 그 안에는 사람을 은근슬쩍 둘로 나누는 계산이 깔려 있습니다. 몸뚱이는 이 자리에 남겨 수를 채우게 하고, 머리가 하는 판단은 저 위쪽 몇 사람의 몫으로만 돌려놓는 계산이죠. 임마누엘 칸트는 사람을 한낱 도구로만 쓰는 일과, 그 사람 자체를 목적으로 대하는 일을 갈라 말했습니다. 여기서 ‘목적으로 대한다’는 건 거창한 게 아닙니다. 저 사람에게도 스스로 생각하고 정할 몫이 있다고 여겨 주는 일, 딱 그만큼입니다. 그렇게 보면 ‘생각은 윗선이 한다’는 한마디가 무슨 일을 하는지 조금 또렷해집니다. 그 말은 바로 그 몫을, 조용히 걷어 가 버립니다. 손과 시간은 빌려 쓰되, 그 사람이 스스로 생각할 자리는 셈에서 지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릿수는 몸으로 얼마든 채워져도, 생각이 빠져나간 그 자리만은 채우면 채울수록 도리어 한 칸씩 비어 가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말...

돌본 시간에는 아직 이름이 없어서

스무 해였다고 합니다.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고, 열이 오른 아이 곁에서 밤을 지새우고, 이 집이 조용히 굴러가도록 매일 조금씩 손을 보태 온 스무 해. 그 시간을 다 지나 이제야 겨우 어깨를 펴 보려는데,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이런 말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애들 다 키웠으니 그만 놀고, 이제 일 좀 알아봐라.” 그 자리에서는 웃으며 넘기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다른 말은 다 흘러갔는데 유독 한 단어가 목에 걸렸다고 해요. ‘놀다.’ 그 한마디에, 지나온 스무 해가 통째로 ‘아무것도 안 한 시간’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고요. 삼키고 돌아선 그 저녁을,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도 겪어 보신 분이 계실 겁니다. 꼭 살림만의 일은 아닙니다. 정년을 맞고 집에 계신 분께 “요즘 뭐 하고 지내세요?”라고 묻는 순간에도, 오래 곁을 지켜 간병해 온 분께 “이제 좀 편해졌겠네”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비슷한 무언가가 스칩니다. 나쁜 마음으로 한 말이 전혀 아닌데도, 듣는 사람의 지난 시간이 그 한마디에 슬그머니 지워지는 순간들 말입니다. 오늘은 이 장면을, 평소보다 조금 천천히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있던 일이 ‘없던 일’로 불릴 때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사람은 혼자 힘으로 자기 자신이 되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는 곁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비춰 주느냐와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귀하게 봐 줄 때 나는 조금 더 나다워지고, 누군가 나를 하찮게 볼 때 나 역시 조금씩 작아집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에게 잘못된 상(像)을 씌우는 일 —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뒤틀린 모습으로 비춰 주는 일 — 을 그저 예의 없는 실수쯤으로 넘기지 않았습니다. 그건 한 사람의 지난 시간을 조용히 눌러 앉히는 일이 될 수 있으니까요. 이 시선을 얹으면, ‘놀았다’는 그 한마디가 왜 그토록 오래 목에 걸렸는지가 조금 다르게 드러납니다. 서운함의 정체는 아마 ‘고맙다는 말을 못 들어서’가 아닐 겁니다. 밥을 짓고 아이를 ...

열려 있다는 말과, 들어갈 수 있다는 말 사이

며칠을 벼르다 나선 걸음이었다고 합니다. 서류를 챙기고 봉투에 넣어 아침 일찍 구청까지 가셨는데, 창구에서 돌아온 안내는 한 문장이었습니다. “그 민원은 이제 앱으로만 접수됩니다.” 그 앱을 깔 줄 몰랐던 그분은, 챙겨 간 봉투를 그대로 든 채 돌아 나오셨다고 합니다. 비슷한 뒷모습은 사실 곳곳에 있습니다. 주문을 화면으로만 받는 식당에서 뒤에 늘어선 줄을 등으로 느끼며 진땀을 흘리는 분, 표가 휴대폰 안에서 먼저 다 팔린 줄 모르고 새벽부터 역 창구에 줄을 서신 분, 지점이 사라진 동네에서 통장 정리 한 번을 위해 버스를 두 번 갈아타는 분. 장면은 제각각이어도 구조는 닮았습니다. 문은 분명히 있는데, 어떤 손에는 손잡이가 없습니다. 저도 이런 장면을 오래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정도로 넘겨 왔습니다. 그런데 그날의 안내문 속 한 단어가 자꾸 걸렸습니다. “됩니다.” 되긴 됩니다. 다만 누구에게 되는지가, 그 문장에는 빠져 있었습니다. ‘있다’는 것과 ‘할 수 있다’는 것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은 평생 이 간격을 들여다본 사람입니다. 그가 보기에, 한 사회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마련해 주었느냐는 이야기의 절반일 뿐입니다. 나머지 절반은 그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게 되었느냐이고, 센은 바로 이 ‘실제로 할 수 있음’을 자유라고 불렀습니다. 자유는 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내가 그 문을 열고 지나갈 수 있다는 사실 쪽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선을 얹으면 그날의 구청 장면이 조금 다르게 드러납니다. “앱이 있으니 서비스는 열려 있습니다”는 문 쪽의 사정입니다. “저는 그 앱을 쓸 수가 없습니다”는 사람 쪽의 사정입니다. 우리는 자주 앞의 문장으로 뒤의 문장을 덮습니다. 서비스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 서비스에 가 닿지 못한 사람의 존재를 가려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날 발길을 돌린 분이 무언가 모자랐던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누구나 쉽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그리는 ‘...

웃음이 유일한 대답이었던 자리에 대하여

면접 전날 밤, 예상 질문 목록을 만들어 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지원 동기, 직무 경험, 갈등을 풀어본 사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까지. 저도 그날 밤 그렇게 목록을 채우고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실제로 저를 오래 붙잡은 질문은 그 목록 어디에도 없던 것이었습니다. "그 나이가 되도록 결혼은 왜 안 하셨어요?" 질문 자체는 몇 초 만에 지나갔습니다. 정작 오래 남은 건 그다음이었습니다. 테이블 건너편에 여러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누구도 화제를 돌리거나 "그 질문은 넘어가시죠" 하고 끊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색하게 웃었고, 면접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음 항목으로 넘어갔습니다. 비슷한 장면은 면접장 바깥에도 있습니다. 명절 밥상에서 취업과 결혼과 출산이 차례로 호명될 때, 회식 자리에서 누군가의 사생활이 안주처럼 올라올 때. 묻는 사람은 대개 악의가 없었다고 말하고, 듣는 사람은 대개 웃습니다. 그리고 그 웃음으로 장면이 닫힙니다. 조용함이 말해주는 것 그런데 그 방을 조금 다른 자리에서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질문한 사람에게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에 걸린 건 그 사람보다 그 방의 조용함이었습니다. 왜 아무도 말리지 않았을까요. 그 자리에 유난히 못된 사람들만 모여 있었던 걸까요.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존중이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표현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속으로 상대를 아무리 귀하게 여겨도, 상대를 깎아내리지 않는 말과 몸짓의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그 마음은 끝내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모욕도 꼭 나쁜 마음에서만 나오는 게 아닙니다. 전달의 형식이 마련되지 않은 자리에서는,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궁금증이 그대로 모욕이 되어 건너갑니다. 면접장은 기울기가 큰 자리입니다. 한쪽은 묻고, 한쪽은 뽑히기를 기다립니다. 기울기가 클수록 표현의 형식이 더 절실해지는데, 정작 그날 그 방에는 "여기까지는 묻지 않는다"는 선도, 그 선을 넘었을 때 끊어...

20초의 진료실에서, 우리가 만난 것

한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대기실 의자에서 번호가 넘어가는 전광판을 몇 번이나 올려다보고, 제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다 마침내 진료실 문을 밀고 들어섰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고개를 들지 않으셨습니다. 모니터에 뜬 숫자들을 눈으로 훑으시더니, '네, 괜찮네요' 한마디로 진료를 닫으셨어요. 문을 나서기까지 채 20초가 걸리지 않았습니다. 혹시 이런 진료실, 그리 낯설지 않으신가요. 비슷한 장면은 병원 바깥에도 많습니다. 은행 창구에서 번호표를 뽑고 한참을 기다렸다가, 정작 앉으니 직원의 시선은 서류와 화면 사이만 오가고 저는 그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던 순간. 민원 창구에서, 콜센터 너머에서, 제 사정을 다 말하기도 전에 '그건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로 매듭지어지던 순간. 딱히 나쁜 사람을 만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뒤끝이 남습니다. 그날의 서운함을 저는 오래 '너무 짧았다'는 말로만 설명했어요.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마음에 남은 건,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조금 다른 무엇이었습니다. 그 20초를 가만히 되감아 봅니다. 짧았던 것보다 마음에 걸렸던 건, 그 시간 내내 선생님의 눈이 저라는 사람이 아니라 모니터 속 수치에만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이었어요. 검사 결과가 정상이라는 건 참 고마운 일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수치를 몸에 안고, 나름의 걱정을 품은 채 문을 밀고 들어간 '한 사람'이었는데, 그 20초가 마주한 건 사람이 아니라 숫자였던 셈이지요.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우리가 누군가를 두 가지 방식으로 만난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마주 앉은 이를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로 대하는 '나-너'의 만남이고, 다른 하나는 처리해야 할 대상으로만 다루는 '나-그것'의 관계입니다. 어려운 말 같지만 실은 우리 하루에 늘 있는 일이에요. 검사 수치는 '그것'입니다. 처리하고 넘기면 되는 대상이지요. 그런데 그 수치를 안고 들어온 사람은 '너'입니다. 그날 진료실의 ...

말이 옆으로 흘러갈 때, 지나쳐 간 것

물건을 고르러 매장에 들어섰는데, 직원분이 정작 저는 건너뛰고 옆에 선 일행에게만 말을 거는 순간이 있습니다. 무엇을 찾으시냐는 물음도, 값을 알려주는 말도, 눈길도 전부 옆으로 흘러갑니다. 정작 물건을 고르고 계산을 할 사람은 저인데도요. 휠체어에 앉아 있을 때 유난히 자주 겪는 일이라고들 하지만, 꼭 그 자리가 아니어도 한 번쯤은 스쳐 지나가 보지 않으셨을까요. 비슷한 장면은 뜻밖에 여러 곳에 있습니다. 병원 진료실에서 의사가 정작 아픈 당사자가 아니라 곁에 앉은 보호자에게만 설명을 이어갈 때, 어르신을 앞에 두고 자식들끼리 “어머니가 요즘 통 못 드셔서요” 하고 당사자 없는 대화를 나눌 때, 어린아이를 앞에 세워두고 어른들이 그 아이 이야기를 아이는 못 알아듣는다는 듯 주고받을 때. 분명 그 자리에 있는데, 대화의 상대로는 초대받지 못하는 순간들입니다. 말이 흘러간 방향을 따라가 보면 이 장면에서 딱 하나 — 그 말이 누구를 향해 갔는가 — 그 방향만 가만히 따라가 보고 싶습니다. 무엇을 드릴지 묻는 말도, 눈맞춤도, 값을 알려주는 말도 전부 제 옆 사람에게로 향했습니다. 저는 분명 거기 있었는데, 이야기의 상대로는 한 번도 불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건너뛰어진 것은 제 순서가 아니라, 저를 마주 볼 시선 그 자체였던 셈입니다. 철학자 헤겔은 사람이 한 사람으로 서는 순간을 뜻밖의 자리에 두었습니다. 내가 ‘나’가 되는 것은 혼자 힘으로 이뤄지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 나를 마주 보고 말을 걸어 ‘당신이 여기 있다’고 알아봐 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인정(認定)이라 불렀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볼 때에야 각자가 비로소 ‘나’로 선다는 것 — 그러니까 존엄은 혼자 완성되는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무엇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눈으로 다시 보면, 그날 매장에서 스쳐 지나간 것이 조금 다르게 읽힙니다. 제가 서운했던 건 물건을 못 사서가 아니었습니다. ‘여기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말이 옆으로 흘러가는 그 방향에 ...

'이것부터'라는 말이, 조용히 정한 순서

어렵게 준비한 이력서를 내미는 장면을 한번 떠올려 봅니다. 몇 해에 걸쳐 배우고, 현장에서 익히고, 나름 실력이라 부를 만한 것을 손에 쥐고 문을 두드립니다. 그런데 상대가 그 이력서를 채 펼치기도 전에, 먼저 돌아오는 말이 있습니다. “우선 한국말부터 배우고 오세요.” 다른 나라에서 살다 온 분들이 취업 문 앞에서 유난히 자주 듣는 말이라고 합니다. 비슷한 장면은 국경을 넘지 않아도 곳곳에 있습니다. 외국에서 딴 자격증을 들고 온 분이 국내 인정 절차 앞에서 몇 해를 대기실에 머무는 일, 오래 살림을 하다 다시 일하려는 분이 “요즘은 다 전산으로 해서요”라는 한마디에 경력 자체를 펼쳐 보이지도 못하는 일. 분명히 가진 게 있는데, 그것을 꺼내 놓을 자리에 닿기도 전에 발길을 돌린 경험 — 한 번쯤 스쳐 가지 않으셨을까요. 문은 닫혀 있고, 실력은 안에 다 있을 때 여기서 이 장면을 조금 다른 자리에 놓고 바라보고 싶습니다. “한국말부터 배우세요”라는 말은, 언뜻 들으면 챙겨 주는 말처럼 다정합니다. 그런데 그 다정함은 정작 그 사람이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한 번도 묻지 않습니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사람의 존엄을 이렇게 봤습니다. 존엄은 무엇을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니라, 가진 것을 세상에서 실제로 펼칠 자유가 열려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요. 이 눈으로 보면 오늘 장면이 조금 다르게 읽힙니다. 실력은 이미 그 사람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사라진 것도, 모자란 것도 아니에요. 다만 그 실력이 세상으로 나올 문 앞에 누군가 ‘이것부터’라는 조건 하나를 걸어 두면, 안에 아무리 많은 것이 있어도 문이 닫혀 있는 한 그것은 없는 셈처럼 취급됩니다. 그러니 뒤로 밀린 것은 그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그 능력을 받아 등록할 자리가 아직 열리지 않았다는 신호에 가깝습니다. 한 가지 짚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건 누가 못돼서 벌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그 말을 건넨 담당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차가웠던 게 아니에요. 애초에 자리가 그렇게 짜여 있습니다. 언어를 익히...

손에 쥐여줄 수도 있었던 몇 초

계산을 마치고 거스름돈과 카드를 돌려받는 순간을 떠올려 봅니다. 어떤 날은 상대의 손끝이 제 손바닥에 닿도록 가만히 놓아주고, 어떤 날은 계산대 위에 툭, 던지듯 내려놓습니다. 액수는 똑같고 걸리는 시간도 몇 초 차이가 안 됩니다. 그런데 던지듯 놓인 동전을 주섬주섬 쓸어 담아 나온 날은, 이상하게 그 장면이 하루 종일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곤 합니다. 비슷한 순간은 계산대 바깥에도 많습니다. 서류를 검토받으러 갔는데 상대가 눈도 맞추지 않고 종이를 책상 위로 밀어놓을 때, 식당에서 접시가 소리 나게 탁 내려놓일 때, 문을 먼저 지난 사람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손을 놓아버릴 때. 하나같이 '뭐라 하기도 애매한' 작은 일들입니다. 항의할 거리도 못 되고, 말을 꺼내면 오히려 제가 예민한 사람이 되어 버릴 것 같은, 그런 크기의 순간들이지요.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바라보고 싶습니다. 정치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은 좋은 사회의 기준을 뜻밖의 자리에 두었습니다. 무엇을 얼마나 많이 나눠주느냐가 아니라,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느냐'에 둔 것이지요. 그는 그런 사회를 '품위 있는 사회'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그가 말한 모욕은, 누군가에게 '나는 여기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느낄 만한 정당한 이유를 건네는 일입니다. 이 정의에서 중요한 건 '정당한 이유'라는 말입니다. 던지듯 놓인 잔돈에 마음이 걸리는 건, 제가 유난히 자존심이 세서가 아니라 실제로 그럴 만한 근거가 눈앞에 놓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손에 쥐여주는 몇 초와 던지듯 놓는 몇 초, 그 사이의 차이는 돈의 액수가 아니라 앞에 선 사람을 잠깐이라도 '사람'으로 마주 보았는가의 차이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때 계산대에 놓인 건 동전만이 아니라, 서로 눈이 닿을 수도 있었던 잠깐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그 몸짓을 한 사람이 유독 못된 사람일까요. 저는 그렇게 보...

복도는 매일 깨끗했습니다

아침에 건물에 들어서면 복도가 먼저 맞아 줍니다. 어제 저녁 누군가 흘리고 간 흔적도, 밤사이 쌓였을 먼지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 깨끗함을 아무 생각 없이 밟고 지나갑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건 꽤 이상한 일입니다. 복도가 저절로 깨끗해지는 건물은 세상에 없으니까요. 건물 청소 일을 오래 하신 어느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고 합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같은 사람들과 마주치는데, 사람으로 인사를 받아 본 기억이 거의 없다고요. 눈이 마주쳐도 시선은 대개 그분을 통과해 지나간답니다. 벽이나 소화전 앞을 지날 때처럼요. 비슷한 자리는 곳곳에 있습니다. 새벽마다 문 앞에 놓여 있는 상자, 언제나 정돈되어 있는 탕비실, 밤새 비워져 있는 분리수거장. 결과는 매일 만나는데, 그 결과를 만든 사람과 마주친 기억은 잘 없습니다. 결과만 남고 사람은 지워질 때 여기서 잠깐, 이 장면을 다른 자리에서 한번 봐보고 싶습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사람을 한낱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도 대하라고 말했습니다. 문장이 딱딱하지만 뜻은 단순합니다. 누군가의 일손에 기대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일에 기대어 삽니다. 문제는 '만'이라는 한 글자입니다. 그 사람이 내놓은 결과만 쓰고 그 사람 자체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질 때,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기능으로 그 자리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번 더 멈추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 못되어서 생기는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복도를 지나치던 사람들 하나하나가 차가웠던 게 아닙니다. 애초에 자리가 그렇게 짜여 있습니다. 청소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시간에 하도록 배치되고, 관리 장부에는 '깨끗한 복도'라는 결과만 오를 뿐 그 복도를 만든 사람의 이름이 들어갈 칸은 없습니다. 건물이 매끄럽게 돌아갈수록 일하는 사람은 더 보이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매일 본 것은 어쩌면 깨끗한 복도가 아니라, 사람이 지워진 자리였...

이름 한 줄이 빠졌을 뿐인데, 왜 마음까지 헐거워질까요

마을 행사 날을 한번 그려봅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와서 천막을 세우고, 접이식 의자를 나르고, 큰 솥에 국을 안칩니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 무렵엔 이미 등이 땀으로 젖어 있고요.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손을 보태고, 다 끝난 저녁에 누군가 결산서 한 장을 돌립니다. 빌린 의자값, 국 재료값, 들어오고 나간 돈이 줄줄이 적혀 있어요. 그런데 아무리 훑어봐도, 그 새벽부터 이 모든 걸 굴린 ‘나’를 적을 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혹시, 어딘가에서 이런 경험 있으신가요. 꼭 마을 행사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몇 주를 매달려 만든 기획안이 회의에서 다른 사람 이름으로 발표되던 순간. 팀이 상을 받았는데 무대엔 나만 빼고 올라가던 자리. 명절 내내 부엌을 지켰는데, ‘수고했다’는 말은 정작 상 앞에 앉아 있던 사람에게로 가던 저녁. 하나같이, 일은 분명 내 손을 거쳐 갔는데 그 흔적이 어디에도 남지 않는 장면들이에요. 서운하다고 말하기엔 스스로도 ‘내가 유난인가’ 싶어 삼키게 되는, 그런 장면들. 빠진 건 이름 한 줄이었을까요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결산서를 다시 들여다보면 이상한 대칭이 보입니다. 빌린 의자에도, 사 온 국 재료에도, 오간 돈 한 푼에도 저마다 적힐 칸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걸 새벽부터 굴린 ‘사람’만 칸이 없습니다. 물건과 돈은 기록되는데, 그걸 움직인 사람은 기록되지 않는 거죠. 캐나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여기에서 곱씹어 볼 만한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사람은 혼자 힘으로 ‘나’가 되는 게 아니라, 남들이 나를 어떻게 알아봐 주느냐 속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빚어진다는 겁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여기는지는 상당 부분, 남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고 어디에 세워 주느냐에 기대어 만들어진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누군가에게 ‘알아봐 줌’을 받는 건 단순히 기분 좋은 일이 아니라, 내가 나로 서 있게 해 주는 바탕에 가깝습니다. 이 눈으로 보면, 명단의 빈자리는 단순한 ...

'편한 일만 하세요'라는 말이, 다정하게 접어버린 것

오랜만에 다시 출근한 첫날을 그려봅니다. 몇 달 자리를 비운 사이, 예전에 제가 맡던 큰 일들은 어느새 다른 사람 손으로 넘어가 있습니다. 책상은 그대로인데, 그 위에 놓이는 일은 예전 같지 않아요. 대신 돌아오는 말은 다정합니다. “이제 무리하지 말고, 편한 것만 해요.” 고마운 말입니다. 그런데 왠지, 자리에 앉아 있는데도 어딘가 헐거워진 느낌이 듭니다. 혹시, 낯익은 장면 아니신가요. 비슷한 장면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습니다. 오래 아프고 돌아온 동료에게 “당분간 가벼운 것만 보세요” 하고 서류를 덜어 주는 자리. 나이 지긋한 선배에게 “이제 좀 쉬엄쉬엄하세요” 하며 새 프로젝트에서 슬쩍 빼놓는 회의. 아이를 낳고 돌아온 분에게 “애 보느라 힘든데 큰 건 맡기기 미안해서” 하며 배려랍시고 자잘한 일만 몰아주는 사무실. 하나같이 따뜻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서운하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장면들이에요. 덜어진 게, 정말 짐뿐이었을까요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편한 일만 맡긴다’는 건 분명 배려입니다. 몸 상하지 말라고, 무리하지 말라고요. 그런데 인도의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람의 존엄은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그것으로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자유에 있다고요. 통장에 얼마가 있느냐보다, 그 돈으로 어떤 삶을 살아낼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 눈으로 보면, 오늘 장면에서 조용히 사라진 게 무엇이었는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리는 그대로 남아 있어요. 이름표도, 책상도, 월급도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할 수 있는 일의 목록’은 하나둘 지워집니다. 큰 일, 어려운 일, 나를 성장시키던 일이 다정한 손길에 밀려 사라지고 나면, 끝내 남는 건 자리뿐입니다. 존엄이 ‘할 수 있음’에 걸려 있다면, 그 ‘할 수 있음’을 접어 두라는 배려는 어떤 날엔 존엄의 한 조각을 함께 접어 버리는 일이 되기도 해요. 중요한 건, 이게 누가 못돼서 생긴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편한...

그 존댓말은, 처음부터 저를 향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손님이 밀려드는 홀에서, 사장님이 계실 때는 다들 저를 향해 깍듯했습니다. “여기 좀 도와주시겠어요?”, “수고 많으세요.” 말끝마다 존댓말이 또렷했고, 그 순간만큼은 저도 한 사람 몫으로 여기 서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이 잠깐 자리를 비우자, 바로 그 같은 사람 입에서 반말이 툭 튀어나오더군요. 몇 초 사이에 말투 하나가 통째로 갈아 끼워진 겁니다. 혹시 이런 순간을, 어딘가에서 한 번쯤 겪어 보신 적 있으신가요? 꼭 식당 홀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상사가 지켜볼 때는 상냥하던 목소리가, 문이 닫히는 순간 차갑게 바뀌던 사무실. 손님이 곁에 있을 때와 없을 때, 매장 막내를 부르는 말이 딴판이던 가게. 우리는 같은 사람에게서 두 개의 말투를 번갈아 보는 순간을, 생각보다 자주 마주칩니다. 대개 우리는 여기서 ‘사람이 참 이중적이네’ 하고 생각을 멈춥니다. 기분이 상하고, 조금 무시당한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럴 만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장면을, 그 사람을 탓하기 전에 한 걸음만 떨어져서 다시 봐볼게요. 말투가 바뀐 그 몇 초 사이에 존댓말이 반말로 넘어간 그 짧은 사이에, 사실 달라진 건 딱 하나였습니다. 저를 지켜보던 ‘윗사람’이 곁에 있느냐, 없느냐. 제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는데, 오직 보는 눈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 대접이 통째로 달라진 겁니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존중이라는 것을, 힘의 차이가 분명히 있는 사이에서도 상대를 낮잡지 않는 태도라고 말합니다. 지위가 위든 아래든, 그 격차와 상관없이 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존중의 진짜 모습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내가 상대를 어떻게 대하느냐에서 드러난다고 그는 봅니다. 누가 지켜볼 때만 켜지는 예의는, 사실 그 사람이 아니라 지켜보는 눈을 향한 것이니까요. 그렇게 보면, 조금 전 저에게 쏟아지던 그 존댓말은 처음부터 저를 향한 게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저 너머에 선 사장님을 향해 있었고,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