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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매도 괜찮은 한 칸 — 무인 계산대 앞에서 다시 본 품위

무인 계산대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화면을 몇 번 눌러 보다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결국 고개를 들어 직원을 찾습니다. “이거 어떻게 해요?” 돌아온 첫마디는 설명이 아니었습니다. “뒤에 밀려요.” 그 목소리는 물어본 사람에게서 멈추지 않았고, 뒤에 선 사람들이 모두 함께 들었습니다. 그 줄에 서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뒤에서 기다리던 쪽이었을 수도 있고, 화면 앞에서 손을 멈춘 쪽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주차 정산기 앞에서 카드 넣는 곳을 찾느라 뒤차의 시선이 등에 닿던 순간, 처음 가 본 식당의 태블릿 메뉴판에서 주문 버튼을 못 찾아 괜히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순간도 닮았습니다. 그런 때 사람을 가장 작게 만드는 건 모른다는 사실보다, 모르는 모습이 남들 앞에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이 장면은 대개 ‘그 직원이 불친절했다’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정리하고 나면 빠지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이 닿은 범위 조금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겠습니다. “뒤에 밀려요”라는 말은 따지고 보면 틀린 안내가 아닙니다. 실제로 줄은 밀리고 있었을 테니까요. 걸리는 건 그 말이 한 사람에게 건네지는 대신 줄 전체에 울렸다는 점입니다. 같은 문장이라도 곁에서 낮게 건네졌다면 안내였겠지만, 모두가 듣는 자리에서 울리면 그 사람을 ‘줄을 막는 사람’으로 세워 두는 일이 됩니다.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를, 그 사회의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라고 설명했습니다. 그가 눈여겨본 대목은, 사람들끼리 서로 모욕하지 않는 것과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 것을 나누어 보았다는 데 있습니다. 한 사람의 말투는 그 사람의 몫이지만, 누군가를 남들 앞에서 작아지게 만드는 자리가 날마다 되풀이된다면 그건 누군가의 성격보다 그 자리가 짜인 방식을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보면 계산대 곁의 직원도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기계 여러 대를 혼자 맡고, 줄은 길어지고, 한 사람 곁에 오래 머물 틈은 없습니다. 무인 계...

자리가 비는 일과 사람이 떠나는 일

그만두겠다는 말은 대개 한 번에 나오지 않습니다. 언제 꺼낼지, 첫 문장을 무엇으로 할지 몇 번이고 고른 끝에야 겨우 입 밖으로 나오지요. 그렇게 꺼낸 말에 “안 맞으면 다른 사람 뽑으면 되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저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건넨 한마디였습니다. 비슷한 장면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퇴사 소식이 알려진 그 주에 같은 자리의 채용 공고가 먼저 올라오는 일, 송별 인사보다 인수인계 양식이 먼저 도착하는 일. 어느 쪽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일은 계속되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이상하지 않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그 순간에 무엇이 조용히 지나갔는지는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자리를 채우는 말, 사람을 향한 말 이 장면을 조금 다른 쪽에서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18세기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사람을 결코 한낱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도 대하라고 했습니다. 흔히 ‘목적의 정식’이라 부르는 원칙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글자는 ‘만’입니다. 사람이 서로에게 수단이 되는 일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는 날마다 누군가의 일에 기대어 삽니다. 문제는 한 사람이 오직 기능으로만, 어떤 자리를 채우는 무엇으로만 여겨질 때입니다. 이 원칙 곁에 ‘다른 사람 뽑으면 되지’라는 대답을 놓아 보겠습니다. 그 대답이 실제로 응답하고 있는 질문은 “이제 이 일은 누가 하지?”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또 하나의 질문이 함께 놓여 있었습니다. 지금 떠나겠다고 말한 이 사람은 그동안 여기서 무엇을 해 왔고, 왜 떠나려 하는가. 앞의 질문에만 답이 돌아오고 뒤의 질문은 아무도 꺼내지 않은 채 대화가 끝났다면, 그 장면에서 비어 있던 건 바로 두 번째 질문의 자리입니다. 이 원칙을 세운 같은 책에는 이런 구분도 나옵니다. 같은 값어치의 다른 것으로 바꿔 놓을 수 있는 것에는 값이 있고,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에는 존엄이 있다는 구분입니다. 역할은 앞쪽에 속합니다. 같은 일을 해낼 사람은 언젠가 구...

질문이 길을 바꾼 뒤에

아침에 자리에 앉습니다. 예전 같으면 컴퓨터가 채 켜지기도 전에 누가 옆에 와 섰습니다. 이거 전에 한번 있었던 건 같은데 그때 어떻게 처리했었죠, 하고요. 오전에 두어 번, 오후에도 비슷하게. 그러다 보면 하루가 갔습니다. 요즘은 하루가 다 가도록 그런 발걸음이 오지 않습니다. 사무실이 한가해진 것도 아닙니다. 옆에서 누가 막혀 한숨 쉬는 소리도 들립니다. 다만 그 다음 발걸음이 이쪽으로 오지 않을 뿐입니다. 정년이 가까워졌다는 이야기가 한 바퀴 돈 뒤로는 더 그렇습니다. 사내 메신저 방에서도 비슷한 순간이 옵니다. 누군가 질문을 올리고 잠시 뒤 다른 사람이 답을 답니다. 그 답을 읽다가, 저건 그렇게만 하면 나중에 한 번 더 걸리는데, 하는 생각이 스칩니다. 자판 위에 손이 잠깐 머물다 그냥 내려옵니다. 물음은 줄지 않았습니다 이런 하루는 보통 서운함이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그런데 조금 떨어져서 보면 그날 물음 자체가 줄어든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오늘도 막혔고, 막힌 사람은 어딘가에 묻습니다. 물음의 양은 그대로인데 도착하는 곳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이제 그것들은 매뉴얼로 가고, 검색창으로 가고, 새로 온 담당자에게로 갑니다. 헤겔은 사람의 자기의식이 혼자 힘으로 서지 않는다고 봤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봐 줄 때 비로소 선다고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대목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는 내 안에서 완성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한 번 거쳐 나에게 돌아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눈으로 보면 '이건 저분이 잘 안다'는 자리는 한번 얻어 두면 계속 가지고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누군가 찾아와 물어 줄 때마다 새로 세워지는 자리에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묻는 일은 정보를 얻는 일만은 아닙니다. 그 사람을 아는 사람으로 한 번 더 세워 두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눈이 서류 쪽으로 갑니다. 인수인계서에는 적을 자리가 정해져 있습니다. 맡던 업무, 진행 중인 건, 파일이 있는 위치, 연락해야 할 곳. 전부 옮겨지는 것들의 목록입니...

목록이 되지 못한 쪽

한동안 일을 쉬었다가 다시 시작해 보기로 마음먹는 날이 있습니다. 그 결심은 대체로 조용하게 옵니다. 오래 안 입던 옷을 꺼내 걸어 두고, 서류 몇 장을 챙기고, 약속한 곳으로 갑니다. 거기까지 오는 데 며칠이 걸렸다는 건, 그 자리에 앉으면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됩니다. 그리고 첫 종이를 받아 듭니다. 마지막으로 일한 날짜를 적고, 그 뒤로 비어 있는 기간을 적고, 해 본 적 없는 업무에 표시를 합니다. 이 부분은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날짜는 정확하고, 공백은 계산이 되고, 안 해 본 일은 세기 쉬우니까요. 종이가 끝날 때쯤이면 제법 많은 것이 채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 어디에도, 이 사람이 지금 무엇을 잘하는 사람인지는 한 줄도 적히지 않은 채입니다. 비슷한 순서를 다른 자리에서도 만납니다. 육아휴직에서 돌아온 첫 면담이 그동안 바뀐 것들과 놓친 것들부터 짚고 시작할 때. 상담 자리의 대화가 무엇을 해 왔느냐가 아니라 왜 그만두었느냐에 오래 머물 때 말입니다. 결핍은 적히고, 가능성은 물어야 나옵니다 그런데 이 종이를 한참 들여다보면 한 가지가 걸립니다. 못 하는 것은 왜 이렇게 쉽게 적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일은 날짜와 '없음'으로 줄일 수 있고, 줄여 놓으면 사람 손을 거치지 않고도 정리됩니다. 반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쪽에 속합니다. 누군가 묻고, 그 대답을 끝까지 듣고, 거기에 시간을 내주어야만 비로소 모습을 드러냅니다.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은 사람의 자유를 바로 이 뒤쪽에서 보았습니다.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넓게 열려 있느냐가 곧 자유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는 물음의 방향을 옮겨 놓습니다. 무엇이 모자라는가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는가로요. 그 눈을 빌려 오늘의 종이를 다시 놓아 보면 이상한 균형이 보입니다. 못 하는 것을 적을 자리는 줄줄이 마련되어 있는데,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물어볼 순서는 ...

낮은 목소리가 놓일 자리

계산대 단말기가 한 번 '삑' 하고 카드를 튕겨 냅니다. 화면에는 승인이 되지 않았다는 문구가 뜹니다. 여기까지는 아주 흔한 일입니다. 한도일 수도 있고, 통신이 잠깐 끊겼을 수도 있고, 카드 뒷면이 긁혔을 수도 있습니다. 대개는 다른 카드를 꺼내면 그만인 일이죠. 장면을 바꾸는 것은 그다음 몇 초입니다. 점원이 고개를 들고, 줄 선 사람들에게까지 닿는 크기로 말합니다. 이 카드 안 되시는데요, 다른 카드 없으세요. 말 자체에는 가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계산대를 넘어가는 순간, 카드 한 장의 문제였던 것이 한 사람에 관한 정보로 바뀝니다. 비슷한 몇 초는 다른 곳에도 있습니다. 개찰구에서 잔액 부족 알림이 크게 울릴 때, 식당 입구에서 예약이 확인되지 않을 때. 아무도 화를 내지 않았고 누구도 창피를 주려 하지 않았는데, 뒤에 선 사람들의 시선이 한 사람의 등 뒤로 모입니다. 커진 것은 목소리가 아니라 범위였습니다 한 걸음 물러서서 보면 이상한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결제 실패는 원래 기계와 카드 사이에서 끝날 수 있는 일입니다. 필요한 정보는 거의 다 화면 안에 있고, 화면을 손님 쪽으로 살짝 돌리거나 낮게 한마디 건네는 것으로 충분히 정리됩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는 계산대도 많습니다. 그러니 이 장면에서 달라진 것은 사건의 크기가 아니라, 그 사건이 공유된 범위입니다. 리처드 세넷은 이런 자리를 '존중'이라는 말로 오래 들여다본 사람입니다. 형편과 처지가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상대를 깎아내리지 않고 대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는 것이죠. 그가 붙든 것은 마음씨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친절한 사람과 무례한 사람으로 세상을 나누어 놓으면 설명되지 않는 장면이 너무 많으니까요. 그렇게 보면 이 계산대에 비어 있는 것도 점원의 배려심은 아닙니다. 작은 실패를 조용히 처리할 자리, 낮은 목소리를 놓아둘 한 칸이 애초에 그곳에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매장의 동선은 빠른 회전을 향해 설계되어 있고, 계산대는 대개 ...

전화를 먼저 끊을 수 없는 쪽

전화가 연결됐고, 목소리는 정중했습니다. 욕설도 없었고 언성이 높아지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문장 하나가 통화의 성격을 바꿔 놓습니다. 해결될 때까지 안 끊겠습니다. 그 말은 협박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실해 보입니다. 그리고 두 시간이 지납니다. 그 두 시간 동안 오간 말들은 하나씩 뜯어보면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저쪽에서도 네, 천천히 하세요. 녹취를 그대로 옮겨 적으면 무례한 대목은 한 줄도 나오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통화가 끝난 뒤에 남는 감각은 이상하게도, 차라리 한 번 크게 화를 내고 끊었으면 나았겠다는 쪽입니다. 비슷한 모양은 다른 데서도 봅니다. 마감 시간이 지난 매장 앞에서 금방이면 된다며 웃으며 묻는 손님. 밤 열한 시에 바쁘시면 내일 답해 주세요라고 덧붙여 보내는 업무 메시지. 어느 쪽도 무례하지 않습니다. 그 무례하지 않음이 오히려 장면을 오래 붙잡아 둡니다. 예의는 분명 있었는데 여기서 눈을 조금 옆으로 옮겨 보면, 흐릿한 것은 예의의 양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그 두 시간의 예의는 누구를 향하고 있었을까요. 문장은 분명 공손했지만, 그 공손함이 닿은 곳은 수화기를 든 한 사람이라기보다 전화를 받는 창구 쪽이었습니다. 창구는 지치지 않습니다. 창구에는 퇴근이 없고, 화장실도 없고, 오늘 저녁 약속도 없습니다. 창구를 상대로는 두 시간이 아니라 네 시간도 정중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사람이 세상을 대하는 방식을 두 갈래로 갈라 봤습니다. 마주 선 한 사람으로 대하는 '나-너', 그리고 내 용무를 처리해 주는 무엇으로 대하는 '나-그것'입니다. 어려운 구분은 아닙니다. 같은 상대를 두고도 그 사이에 사람이 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짚은 지점은 '나-그것'이 나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쪽에 서 있는 동안에는 아무리 말이 고와도 사람과 사람 사이가 열리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에 ...

회의록에 없는 한 줄

회의가 시작되기 십 분쯤 전이었습니다. 탕비실에서 커피를 따르다가, 요즘 걸리던 문제를 이렇게 풀면 어떨까 하고 툭 말을 꺼냈습니다. 정리된 문장도 아니었고, 어디 적어 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옆에 있던 분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걸로 끝인 줄 알았습니다. 회의가 시작되고 한참 뒤에 그 말이 다시 나왔습니다. 제 입에서가 아니라 앞자리에서, 아까보다 훨씬 매끄럽게 정리된 문장으로요. 좋은 생각이라는 반응이 몇 마디 오갔고, 회의는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습니다. 그 몇 초 동안 손을 들까 말까 망설였지만 결국 들지 않았습니다. 그거 아까 제가 한 말인데요, 라고 하기엔 시점이 지났고, 무엇보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제가 작아 보일 것 같았습니다. 비슷한 자리는 다른 모양으로도 있습니다. 초안을 만들어 공유 문서에 올려 두면 여러 사람의 손이 지나가고, 최종본 맨 위에는 마지막으로 저장한 사람의 이름이 남습니다. 아무도 무엇을 가져가지 않았는데, 문서를 열어 보면 이것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는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사라진 것은 아이디어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눈은 대개 그 윗사람 쪽으로 먼저 갑니다. 그런데 그쪽만 오래 보고 있으면 놓치는 게 하나 있습니다. 그날 그 아이디어는 아주 잘 지냈다는 사실입니다. 회의에서 멀쩡히 쓰였고, 좋은 평가까지 받았고, 아마 다음 주에는 일정표 어딘가에 자리를 잡았을 겁니다. 없어진 것은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사람이 '나'로 서는 일을 혼자 하는 일로 보지 않았습니다. 내가 한 일이 다른 사람을 한 번 지나 다시 나에게 도착할 때,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조금씩 또렷해진다고 봤습니다. 그러니 그날 돌아오지 않은 것은 칭찬 한마디가 아닙니다. 무언가를 처음 만들어 낸 사람으로 그 자리에 등록될 기회 쪽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눈이 회의록으로 옮겨 갑니다. 회의록에는 적어야 할 자리가 정해져 있습니다. 안건, 결정된 것, 맡을 사람, 언제까지. 전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적는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