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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에서 눈을 드는 데 걸리는 시간

진료실 앞 의자에 한 시간쯤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대기실에 앉아 있는 동안에는 물어볼 것을 속으로 몇 가지 꼽아 두게 됩니다. 언제부터 이랬는지, 밤에 자다 깨는 것도 이것과 관련이 있는지. 이름이 불리고 문이 열립니다. 선생님은 화면에 뜬 결과지를 한참 들여다봅니다. 숫자는 빠짐없이 읽히고, 곧 "이상 없네요" 한마디가 나옵니다. 처방이 나가고 문이 닫힙니다. 꼽아 두었던 것들은 그대로 남아 함께 밖으로 나옵니다. 복도를 몇 걸음 걷다가 "아, 그걸 물어본다는 게" 하고 떠오르는 순간이 있습니다. 다시 들어가기에는 이미 다음 이름이 불린 뒤입니다. 종이는 다 읽혔는데 이 장면에서 시선이 어디에 머물렀는지만 따라가 보겠습니다. 그 몇 분 동안 가장 오래 머문 눈길은 사람이 아니라 결과지 위에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결과지를 읽은 일이 잘못은 아닙니다. 오히려 꼼꼼히 읽혔습니다. 읽어야 할 것은 다 읽혔는데, 그 종이가 애초에 담을 수 없는 것들만 밖에 남았습니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사람이 무언가를 대하는 방식을 두 갈래로 나눠 불렀습니다. '나-너'와 '나-그것'입니다. 앞에 있는 것을 읽고 확인하고 처리하면 끝나는 하나의 대상으로 대하는가, 아니면 나를 마주 보고 있는 한 사람으로 대하는가의 차이입니다. 결과지는 '그것'입니다. 수치는 읽으면 되고, 읽고 나면 할 일이 정해집니다. 종이를 '그것'으로 대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그 종이가 끝내 담지 못하는 한 줄이 있습니다. '오늘 여기 앉은 이 사람이 무엇을 묻고 싶어서 한 시간을 기다렸는가.' 이 줄은 어떤 검사로도 나오지 않습니다. 종이에서 눈을 들어 마주 볼 때에만 열립니다. 부버의 말로 옮기면, 상대를 '너'로 대하는 그 한 번의 순간에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마주봄은 왜 자주 빠질까요. 누군가의 무심함으로 돌리면 이야기가 간단해지지만, 그렇게 보면 ...

매일 사라지도록 되어 있는 일

저녁상이 차려집니다. 국에서는 아직 김이 오르고, 접시는 어제와 조금 다른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밥을 다 먹고 나면 그릇이 개수대로 옮겨지고, 물소리가 잠깐 나다가 그칩니다. 잠시 뒤 부엌은 아침에 보았던 모습으로 돌아가 있습니다. 방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자국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어느 집에서는 이런 말이 오갔다고 합니다. 하루 세 번 상을 차리고 그 사이사이 닦고 개어 두는 일에 대해 한마디를 건넸더니, 돌아온 대답이 "원래 하는 건데 뭘"이었다고요. 모질게 하려던 말은 아니었을 겁니다. 다만 그 말이 나오면 이야기는 거기서 접히고, 곧 다음 끼니 준비가 시작됩니다. 같은 대화가 하루에 몇 번이고 지나갑니다. 이런 장면이 유별난 집에만 있지도 않습니다. 며칠 앓고 일어났는데 집 안이 그대로 굴러가고 있던 아침, 늦게 들어와도 식탁에 덮여 있던 그릇. 되어 있는 것은 매일 만나는데, 그것이 누구의 손을 지나왔는지는 좀처럼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원래'라는 두 글자가 앉아 있는 자리 "원래 하는 건데 뭘"이라는 문장을 천천히 읽어 보면 빠진 것이 하나 눈에 들어옵니다.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가 무엇을 했다는 말이 들어설 자리에 '원래'라는 두 글자가 대신 들어앉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일은 사람이 한 일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런 상태였던 것처럼 들립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주인과 노예' 대목에서, 시키는 쪽이 아니라 실제로 손을 대는 쪽이 오히려 자기를 세우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어려운 말 같지만 이유는 단순합니다. 손을 댄 것은 세상에 남고, 남은 것은 만든 사람에게 되돌아와 '이건 내가 한 것'이라고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깎아 놓은 나무, 지어 놓은 집처럼요. 그런데 살림은 남지 않는 쪽으로 되어 있는 일입니다. 차린 밥은 먹혀서 없어지고, 닦은 바닥은 곧 다시 밟히고, 갠 옷은 다시 입혀져 흐트러집니다. 결과가 사라져야 제대로...

문 안쪽에서는 문이 보이지 않습니다

보조견 한 마리와 함께 매장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인사보다 먼저 "개는 안 됩니다"라는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실랑이는 없었습니다. 목소리가 커지지도 않았고, 설명이 오래 이어지지도 않았습니다. 들어서던 걸음이 방향만 바꾸어, 그대로 문 밖으로 나갔을 뿐입니다. 매장은 잠깐 어색했다가 곧 평소의 소리로 돌아갔을 겁니다. 계산대 벨 소리, 봉투 부스럭거리는 소리. 돌아선 쪽의 하루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저녁 찬거리를 다른 데서 구했는지, 그냥 집으로 향했는지. 그런 일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으니까요. 비슷한 장면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습니다. 들어가려다 돌아선 걸음, 물어보려다 삼킨 말. 큰 사건이 아니라서 뉴스가 되지도 않고, 사과를 받게 되지도 않는 장면들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른 자리에 서서 바라보고 싶습니다. 그날 그 입구에 서 있던 것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요. 보조견은 몇 년을 배웁니다. 수많은 훈련과 여러 번의 시험을 통과한 뒤에야 한 사람의 눈과 발이 되어 거리로 나옵니다. 그러니 그날 문 앞에 서 있던 것은 '손님과 개'가 아니었습니다. 오래 준비되어 이미 완성되어 있던, 한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하루를 건너가는 방식 그 자체였습니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이런 장면을 '역량'이라는 눈으로 다시 봅니다. 말은 낯설지만 뜻은 평이합니다. 사람에게 어떤 능력이 있다는 것과, 그 능력을 실제로 펼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라는 겁니다. 걸을 수 있어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없다면, 고를 수 있어도 진열대 앞까지 갈 수 없다면, 그 능력은 아직 그 사람의 자유가 된 것이 아닙니다. 능력은 사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세상이 맞물리는 자리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시선입니다. 이 눈으로 보면 그날 모자랐던 쪽이 어디였는지가 조금 다르게 드러납니다. 돌아선 분에게는 모자란 것이 없었습니다. 걸을 수 있었고, 고를 수 있었고, 계산할 수 있었습니다. 비어 있던 것...

쉰 시간을 흠이 아니라 삶으로

재취업을 준비하며 면접을 보러 가면, 대화가 순조롭게 흐르다가도 한 대목에서 공기가 살짝 달라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력서 위 어느 몇 달, 아무 소속도 적혀 있지 않은 그 빈 줄에 시선이 닿을 때입니다. "이 기간에는 뭘 하셨어요?" 하는 물음이 던져지고, 그때부터는 준비해 온 답을 말하기보다 그 몇 달을 자꾸 설명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런 자리에 한 번쯤 앉아 보신 분이라면, 그 미묘한 온도 차를 아마 기억하실 겁니다. 비슷한 장면은 면접장 바깥에도 있습니다. 병으로 한동안 쉬었다 돌아온 사람이 오랜만에 마주친 동료에게 안부 대신 "그동안 왜 안 보였어?"를 먼저 듣기도 하고, 아이를 키우느라 일을 멈췄던 사람이 모임에 나갔다가 "그 긴 시간 아깝지 않았어요?"라는 말에 머쓱해지기도 합니다. 누구도 언성을 높이지 않았고, 모진 말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돌아 나오는 발걸음은 어쩐지 조금 무거워집니다. 모욕은 늘 목소리를 높이지 않습니다 이 장면을 잠깐 다른 각도에 놓고 보겠습니다. 먼저 눈에 걸리는 건, 그 몇 달을 대하는 질문이 거의 언제나 '왜'로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왜'에 마련된 정답의 자리는 사실상 하나뿐입니다. 남들이 납득할 만한 사유를 대서, 비어 보이는 그 기간을 지워 내는 것. 아이를 돌봤든, 아팠든, 그저 다음 걸음을 고르느라 잠시 멈춰 섰든, 그 시간을 '한 사람이 어쨌든 살아 낸 시간'으로 그냥 적어 둘 칸은 그 질문 안에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은 좋은 사회를 재는 자를 조금 다른 데로 옮겨 보자고 했습니다. 흔히 우리는 얼마나 고르게 나눠 가졌는가로 사회의 됨됨이를 가늠하지만, 그는 '이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가'를 먼저 물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회를 '품위 있는 사회'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가 말한 '모욕'의 뜻...

이름이 아니면 채워지지 않는 자리

새로 들어간 일터에서, 손이 좀 느리다는 이유로 이름 대신 '1번' '2번'으로 불려 본 적 있으신지요. "어이, 2번!" 하는 소리에 어느새 고개부터 먼저 돌아갑니다. 처음에는 별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사람이 많은 현장에서 하나하나 이름을 외우기도 번거로우니, 그냥 부르기 편한 호칭인가 보다 하고 넘어갑니다. 그런데 이런 부름은 꼭 공사장이나 주방 같은 곳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콜센터에서 '상담원 몇 번'으로, 앱 화면 속 '기사님'이라는 이름 없는 이름으로, 병원 대기실에서 '3번 환자분'으로 불리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부르는 쪽에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불리는 쪽이 크게 상처받는 것도 아닙니다. 다들 그러려니 하고 하루가 지나갑니다. 번호는 채워져도, 이름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부르기 편함'을 조금만 더 따라가 보면, 묘한 지점이 하나 드러납니다. 번호에는 이름과 다른 성질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그 자리에 선 사람이 그만두면, 내일 다른 사람이 와서 똑같이 '1번'이 됩니다. 사람이 바뀌어도 번호는 그대로 남습니다. 그런데 이름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이 아니면 채워지지 않는, 세상에 딱 한 자리를 가리킵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사람을 대하는 두 가지 방식을 갈라서 보았습니다. 하나는 필요한 일을 시키기 위한 수단으로'만' 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으로도 바꿔 끼울 수 없는, 그 자체로 목적인 존재로 대하는 것입니다. 칸트는 물건에는 값이 매겨져 다른 것과 바꿀 수 있지만 사람에게는 값이 아니라 존엄이 있어서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도구로 쓰는 건 살면서 어쩔 수 없다 해도, 도구로'만'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 눈으로 다시 보면, 번호로만 불리는 그 자리에 비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그건 그 사람의 능력이나 참을성 같은 게...

이름 없이 떠다니는 생각들

회의가 한창 이어지던 중에 누군가 한 가지 의견을 냅니다. 방 안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끄덕여지고, 좋은 얘기네요, 하는 말도 몇 마디 붙습니다. 그런데 그 의견이 어쩐지 낯익습니다. 며칠 전 복도에서, 혹은 점심을 먹다가 지나가듯 먼저 꺼냈던 바로 그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그거 제가 먼저 했던 생각인데요' 한마디가 목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조용히 가라앉습니다. 삼킨 이유가 조금 묘합니다. 겁이 나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한마디를 꺼내는 순간, 왠지 제가 쪼잔한 사람이 될 것 같아서였습니다. 이런 순간, 꼭 회의실이 아니어도 한 번쯤 겪어 보셨을지 모릅니다. 가족 단톡방에 흘리듯 올린 아이디어가 며칠 뒤 다른 사람 입에서 근사한 계획이 되어 돌아오고, 오래 준비한 제안이 여러 손을 거치는 사이 처음 낸 사람의 이름만 슬그머니 지워지는 자리 말입니다. 대답이 아니라,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눈에 걸리는 건, 분명 좋은 생각을 냈는데 정작 그걸 '내 것'이라 밝히는 쪽이 옹졸한 사람이 된다는 점입니다. 왜 이런 뒤집힘이 생기는 걸까요.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인정이라는 것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았습니다. 내가 한 일은 나 혼자 마음속으로 알고 있다고 해서 내 것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말을 주고받는 자리에서 누군가 '그건 저 사람이 낸 것'이라고 짚어 줄 때, 비로소 그 일이 내 것으로 선다고 보았습니다. 인정은 혼자 품고 있는 감정이 아니라, 여럿이 주고받는 자리에서 생기는 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눈으로 회의실을 보면, 비어 있는 것이 그 사람의 용기가 아니라는 게 드러납니다. 낸 사람과 낸 것을, 아무 다툼 없이 한 번 이어 줄 확인. 그 확인이 놓일 칸이 애초에 없는 겁니다. 안건을 올리고 검토하고 결정하는 순서는 꽤 촘촘히 갖춰져 있는데, '이 생각은 처음 누구에게서 나왔나'를 가볍게 적어 둘 칸만은 어느 순서에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이디어는 주인 없이 떠다니다 ...

제안이 끝나기 전에 돌아온 대답

회의가 한창일 때, 누군가 조심스럽게 손을 듭니다. 이 부분은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답이 돌아옵니다. 그냥 원래 하던 대로 합시다. 반 박자 빠른 그 대답을, 아마 한 번쯤 들어 보셨을 겁니다. 큰 언쟁이 벌어진 것도 아니고, 누가 언성을 높인 것도 아닙니다. 회의는 그대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갑니다. 꼭 회의실 안에서만 있는 일도 아닙니다. 오래 굴러온 가게의 주방에서 새로 온 사람이 순서를 한번 바꿔 보자고 하면, 늘 하던 대로 하라는 말이 먼저 옵니다. 몇 년째 같은 양식을 쓰는 부서에서 누군가 서식을 손보자고 하면, 쓰던 걸 쓰자는 답이 돌아옵니다. 어디서도 규칙을 어긴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꺼내진 방법 하나가, 놓이자마자 조용히 접힙니다. 대답이 제안보다 빨랐다는 것 이 장면에서 먼저 눈에 걸리는 건 대답의 내용이 아니라 속도입니다. 대답이 제안보다 빨랐다는 건, 그 제안이 끝까지 들린 적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하자는 말인지 확인되기도 전에 자리는 이미 닫혀 있었던 셈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갈리는 건 좋은 방법이냐 나쁜 방법이냐가 아닙니다. 그 방법이 좋은지 나쁜지 알아볼 시간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으니까요.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은 사람에게 중요한 건 무엇을 할 줄 아느냐만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 능력을 실제로 써 볼 기회가 열려 있느냐, 거기까지가 한 사람의 자유라는 겁니다. 할 줄 아는 것과, 그것을 해 봐도 되는 자리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품고 있어도 그것을 꺼내 볼 통로가 막혀 있다면, 그 능력은 있으나 없으나 크게 다르지 않게 됩니다. 센이 보기에 자유란 마음속에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바깥에서 펼쳐질 자리가 있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이 눈으로 회의실을 다시 보면 비어 있는 것이 하나 드러납니다. 그 방에는 결정하는 절차가 꽤 갖춰져 있습니다. 안건을 올리는 법, 검토하는 법, 반려하고 다시 올리는 법까지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검증되지 않은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