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시간을 흠이 아니라 삶으로
재취업을 준비하며 면접을 보러 가면, 대화가 순조롭게 흐르다가도 한 대목에서 공기가 살짝 달라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력서 위 어느 몇 달, 아무 소속도 적혀 있지 않은 그 빈 줄에 시선이 닿을 때입니다. "이 기간에는 뭘 하셨어요?" 하는 물음이 던져지고, 그때부터는 준비해 온 답을 말하기보다 그 몇 달을 자꾸 설명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런 자리에 한 번쯤 앉아 보신 분이라면, 그 미묘한 온도 차를 아마 기억하실 겁니다.
비슷한 장면은 면접장 바깥에도 있습니다. 병으로 한동안 쉬었다 돌아온 사람이 오랜만에 마주친 동료에게 안부 대신 "그동안 왜 안 보였어?"를 먼저 듣기도 하고, 아이를 키우느라 일을 멈췄던 사람이 모임에 나갔다가 "그 긴 시간 아깝지 않았어요?"라는 말에 머쓱해지기도 합니다. 누구도 언성을 높이지 않았고, 모진 말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돌아 나오는 발걸음은 어쩐지 조금 무거워집니다.
모욕은 늘 목소리를 높이지 않습니다
이 장면을 잠깐 다른 각도에 놓고 보겠습니다. 먼저 눈에 걸리는 건, 그 몇 달을 대하는 질문이 거의 언제나 '왜'로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왜'에 마련된 정답의 자리는 사실상 하나뿐입니다. 남들이 납득할 만한 사유를 대서, 비어 보이는 그 기간을 지워 내는 것. 아이를 돌봤든, 아팠든, 그저 다음 걸음을 고르느라 잠시 멈춰 섰든, 그 시간을 '한 사람이 어쨌든 살아 낸 시간'으로 그냥 적어 둘 칸은 그 질문 안에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은 좋은 사회를 재는 자를 조금 다른 데로 옮겨 보자고 했습니다. 흔히 우리는 얼마나 고르게 나눠 가졌는가로 사회의 됨됨이를 가늠하지만, 그는 '이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가'를 먼저 물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회를 '품위 있는 사회'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가 말한 '모욕'의 뜻입니다. 모욕이란 누가 목소리를 높이거나 대놓고 깎아내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멀쩡히 지나온 시간을,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흠으로 되돌려 세우는 절차 그 자체가 이미 모욕일 수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그 자리에서 정작 무엇이 빠져 있었는지가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빠져 있던 건 그 사람의 능력도, 성실함도, 각오도 아니었습니다. 그 몇 달을 흠이 아니라 삶으로 받아 적어 둘 칸 하나였습니다. 절차는 공백을 찾아내고 거기에 사유를 채우도록 촘촘히 짜여 있는데, '그 시간 역시 이 사람의 삶이었다'고 인정할 칸만은 어느 순서에도 놓여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건 면접관을 나쁜 사람으로 지목해서 풀리는 문제가 아닙니다. '왜 쉬었냐'고 물은 사람 역시, 대개는 공백을 흠으로 읽도록 짜인 절차 위에 앉아 있을 뿐입니다. 빈 기간을 반드시 캐물어야 한다고 배운 자리에서라면, 그 시간을 삶으로 받아 줄 칸은 애초에 그에게도 주어진 적이 없었던 셈입니다.
빈 시간을 흠으로 읽는 자리들
누군가의 멈췄던 시간에 대고 '왜 그랬냐'부터 묻는 자리는, 생각보다 하루 곳곳에 있습니다. 오래 앓다 돌아온 이에게 건네는 첫마디에는, 반가운 안부와 은근한 해명 요구 사이의 얇은 한 칸이 늘 끼어 있습니다. 한 학기를 쉬고 돌아온 학생이 "왜 휴학했어?"라는 물음 앞에서 자꾸 변명부터 준비하게 되는 자리도 그렇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래 집안일을 도맡다 뒤늦게 다시 일을 찾아 나선 사람에게, 가족이 무심코 "이제 와서 되겠어?"라고 물을 때, 그 말에는 지나온 세월을 흠처럼 되비추는 그림자가 어른거립니다. 묻는 쪽에 악의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쉰 시간'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 대부분이 흠으로 읽는 법만 익혀 왔을 뿐입니다. 한 사람이 지나온 공백을 삶으로 받아 둘 칸은, 이 자리들 어디에도 좀처럼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시선을 더 오래 붙들고 싶으시다면, 아비샤이 마갈릿이 1996년에 펴낸 『품위 있는 사회(The Decent Society)』를 곁에 두어 보시길 권합니다. 이 책은 좋은 사회를 묻는 오래된 질문의 방향을 슬며시 틀어 놓습니다. 무엇을 얼마나 공평하게 나눠 가졌는가를 따지기에 앞서, 그는 '이 제도가 사람을 굴욕에 빠뜨리지는 않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분배의 정의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사회가 지켜야 할 최소한이라는 것이지요.
덕분에 이 책은 누구를 손가락질하는 대신, 우리가 별생각 없이 지나치는 수많은 심사와 창구와 절차의 자리에 사람을 은근히 굽히게 만드는 장치가 얼마나 조용히 깃들어 있는지를 비춰 줍니다. 오늘 면접장에서 빈 기간을 해명하던 그 잠깐을, '개인이 감당할 사정'이 아니라 '제도가 갖춰야 할 품위'라는 시선으로 한 겹 더 겹쳐 읽게 해 주는 책입니다.
돌이켜 보면 저 역시 누군가의 '쉰 시간' 앞에서 안부보다 '왜'를 먼저 꺼낸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유난히 매정해서라기보다, 빈자리를 보면 사연부터 캐묻는 것이 관심의 표현인 줄로만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짧은 물음이 상대에게 어떤 온도로 가닿는지는, 정작 그 시간을 지나온 사람이 먼저 알아차리곤 한다는 걸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오늘 하루 어딘가에서, 우리도 누군가의 멈췄던 시간과 마주쳤을지 모릅니다. 그 시간을 흠으로 받아 이유부터 물었는지, 아니면 삶으로 받아 그저 곁에 앉아 주었는지. 굳이 지금 답을 정할 일은 아닙니다. 다만 다음번에 누군가의 빈 몇 달과 마주하게 될 때, '왜 그랬냐'는 말이 목까지 올라오기 전에 아주 잠깐, 그 시간을 무엇으로 받을지 한 박자만 멈춰 보아도 좋겠습니다. 그 한 박자 안에, 그동안 어느 자리에도 없던 칸 하나가 처음으로 열릴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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