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들리는 자리에서, 소득을 소리 내어 말해야 했던 날

지원 신청 서류를 챙겨 주민센터 창구 앞에 섭니다.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리고, 드디어 제 차례. 서류를 밀어 넣자 직원이 한 줄 한 줄 훑어 내려갑니다. 그러다 고개를 들고, 옆줄에 선 사람도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다 들릴 만한 목소리로 묻습니다. "소득이… 이게 전부세요?" 그 순간 별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네" 하고 답하고, 도장을 받고, 서류를 챙겨 나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돌아오는 길이 조금 작아져 있습니다.

혹시 비슷한 순간을 겪어 보신 적 있으신가요. 꼭 창구만의 일도 아닙니다. 약국에서 "이 약, 보험 안 되는 거 아시죠?" 하는 말을 뒤에 선 사람들과 함께 듣게 될 때, 식당에서 할인 쿠폰을 내밀자 점원이 한 번 더 큰 소리로 확인할 때, 아이 학교에서 급식비 지원 대상을 따로 부를 때. 누가 저를 비난한 것도 아니고, 거친 말이 오간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 자리를 지나온 사람만 어쩐지 어깨가 조금 내려갑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우선, 그 직원은 나쁜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정해진 절차대로 빠짐없이 확인해야 했고, 어쩌면 하루에 같은 질문을 수십 번 반복하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무례하려는 마음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제가 느낀 그 작아짐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요.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라는 개념으로 이 물음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입니다. 그가 말하는 좋은 사회의 기준은 조금 뜻밖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얼마나 친절한가가 아니라,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가에 있다는 겁니다. 친절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음을 내어 채워 넣는 것입니다. 반면 모욕은, 종종 개인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제도의 생김새 안에 이미 들어가 있습니다.

다시 그 창구를 떠올려 보겠습니다. 칸막이가 없어 옆 사람에게 다 들리는 자리, 소득을 소리 내어 확인하도록 짜인 순서, 도움을 받으려면 내 형편의 바닥을 남들 앞에서 한 번 더 드러내야 하는 절차. 이 사이 어디에도 '한 사람이 부끄럽지 않게 설 자리'는 처음부터 설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직원이 친절했다면 그 모욕은 조금 덜했겠지요. 하지만 친절에 기대야만 겨우 면할 수 있는 모욕이라면, 그건 이미 그 자리의 구조가 사람을 위태롭게 세워 둔 것입니다. 아무도 모욕하려 하지 않았는데 그 자리를 지나온 사람만 작아진다면, 그건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자리의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이 시선을 들고 하루를 둘러보면, 같은 빈자리가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회사에서 누군가의 잘못을 전체 메일로 공개해 바로잡을 때, 일은 정정되지만 그 사람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한 번 더 작아집니다. 병원에서 보호자 없이 온 환자에게 큰 소리로 비용을 묻는 순간에도, 학교에서 준비물을 못 가져온 아이를 교실 앞에 세워 둘 때도 그렇습니다. 장면은 매번 다른데, 빠져 있는 것은 늘 같습니다. 일을 처리하는 자리는 분명히 있는데, 그 일을 겪는 사람을 부끄럽지 않게 지켜 주는 자리가 비어 있는 것. 누군가를 미워해서 생긴 빈자리가 아니라, 시스템에 그 칸이 처음부터 없어서 생긴 빈자리입니다.

이 시선을 더 들여다보고 싶다면, 마갈릿의 《품위 있는 사회(The Decent Society)》(1996)를 펼쳐 보셔도 좋겠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가 흔히 좋은 사회를 떠올릴 때 사람들 사이의 따뜻함을 먼저 그리지만 정작 더 근본적인 기준은 따로 있다고 말합니다. 제도가 그 안의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가. 친절은 있으면 좋은 것이지만, 모욕하지 않음은 없어서는 안 되는 바닥이라는 겁니다. 오늘 창구에서 작아졌던 그 순간이 왜 그저 '직원이 무뚝뚝했던 일'로 넘길 수 없는지를, 이 책은 천천히 풀어 줍니다.

저도 예전엔 그런 순간을 그냥 '오늘 담당자가 좀 사무적이었네' 하고 넘기곤 했습니다. 그게 원래 그런 거라고 여겼고, 거기에 무엇이 빠져 있는지는 들여다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번 낯설게 다시 보기 시작하니까, 그 사무적인 말투 뒤에 있던 '자리'가 보이더라고요. 그 자리에는 애초에 사람이 부끄럽지 않게 설 공간이 마련돼 있지 않았던 겁니다.

오늘 하루를 한번 천천히 되감아 보시면 좋겠습니다. 누군가가 유독 작아 보였던 장면이 있었다면, 그 사람의 표정이나 그 담당자의 태도가 아니라, 그 사람이 서 있던 자리 자체를 한번 낯설게 다시 봐보세요. 거기에 '부끄럽지 않게 설 곳'이 마련되어 있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빠져 있었는지. 아무도 그러려 하지 않았는데 누군가를 작아지게 만든 자리가, 어쩌면 오늘 제가 지나온 길에도 하나쯤 있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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