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은 제가 들었는데, 인사는 옆 사람에게 갔습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해 본 적 다들 한 번쯤 있으실 겁니다. 어느 날 저는 어르신께 자리를 내어 드리고, 손에 든 짐이 무거워 보여 그것까지 받아 머리 위 선반에 올려 드렸습니다. 별일도 아니고, 그저 손이 먼저 나갔을 뿐이죠. 그런데 어르신께서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건네신 곳은 제가 아니라, 제 옆에 가만히 서 있던 다른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살짝 당황한 얼굴로 “아, 저는 아닌데요” 하셨고, 저는 괜히 멋쩍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고요. 혹시, 비슷한 순간을 겪어 보신 적 있으신가요.
꼭 버스 안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엘리베이터 문을 잡아 드렸는데 인사는 뒤에 선 사람에게 가는 아침이 있고, 길에서 누군가 떨어뜨린 물건을 주워 건넸는데 고맙다는 말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저녁이 있어요. 한 일은 분명 제 손에서 나왔는데, 그 일에 대한 인사는 자꾸 다른 사람 앞에 가서 멈춥니다. 큰 서운함이랄 것도 없습니다. 그냥 ‘뭐, 인사 한 번 길을 잘못 든 거지’ 하고 넘어가면 그만인 작은 일이죠. 그런데 저는 그 작은 어긋남이 왜 자꾸 반복되는지, 한번 천천히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그 인사는 왜 길을 잘못 들었을까요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보통 우리는 인사가 빗나간 건 받은 사람이 잠깐 무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사람은 혼자 힘으로 ‘나는 이런 사람이다’를 정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봐 주는 그 관계 안에서 비로소 자기 모습을 갖춰 간다고 말합니다. 누군가의 시선에 ‘내가 한 일을 한 사람’으로 비칠 때, 그제야 나는 그 자리에 존재하게 된다는 뜻이에요. 알아봐 주는 눈이 없으면, 한 일은 있어도 그 일을 한 사람은 어쩐지 흐릿해집니다.
그렇게 보면 버스에서의 그 짧은 순간이 조금 다르게 다가옵니다. 어르신을 탓할 일이 아니에요. 낯선 사람들이 빽빽이 선 공간에서, 우리는 장면을 아주 빠르게 훑습니다. 그 빠른 눈은 ‘방금 누가 무엇을 했는가’를 일일이 따라가지 못하고, 대신 ‘이 자리에 어울려 보이는 사람’에게 인사를 돌려보내곤 하죠. 그러니까 그 순간 빠져 있던 건 어르신의 다정함이 아니라, 장면을 읽는 방식 안에 ‘실제로 그 일을 한 사람’이 들어설 칸이었습니다. 한 일은 분명 거기 있었는데, 그 일을 한 사람만 그림에서 슬쩍 지워진 거예요.
이게 누구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게 오히려 마음에 남습니다. 아무도 “네가 한 일을 못 본 척하겠다”고 마음먹지 않았어요. 그저 우리가 서로를 빠르게 알아보는 방식 자체에, 그 사람을 위한 자리가 비어 있었을 뿐이죠. 그래서 화를 낼 대상도 마땅치 않습니다. 화가 날 일이라기보다, 어딘가 칸 하나가 비어 있다는 걸 가만히 알아차리게 되는 일에 가까워요. 그리고 그 빈칸은, 생각보다 우리 하루 곳곳에 나 있습니다.
같은 빈칸이 나 있는 자리들
이 시선으로 보기 시작하면, 닮은 자리가 자꾸 눈에 들어옵니다. 회사에서 밤새 자료를 매만진 사람은 따로 있는데, 회의에서 칭찬은 그 자료를 대신 발표한 사람에게 가는 장면이 있어요. 일은 분명 누군가의 손에서 나왔는데, 그 일이 어느 한 사람의 이름으로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잘못한 사람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일을 ‘누가 했는지’보다 ‘누가 그 자리에 서 있는지’로 읽는 눈이, 거기서도 똑같이 작동한 것뿐이에요.
집에서도 그렇습니다. 명절상을 며칠 동안 준비한 사람과, 상 앞에서 “수고 많았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 다를 때가 있고요. 학교에서 조용히 궂은일을 맡아 온 아이가 끝내 한 번도 호명되지 않는 학기도 있습니다. 병원 복도에서 가장 오래 곁을 지킨 보호자가, 정작 ‘가족 대표’로 불리지 못하는 순간도 있고요. 같은 빈칸이 이렇게 하루 곳곳에 번져 있어요. 누군가는 분명 그 일을 했는데, 그 사람이 ‘그 일을 한 사람’으로 알아봐지는 자리만 자꾸 비어 있는 겁니다.
이 시선을 더 들여다보고 싶다면
이 시선을 한 권으로 차분히 펼쳐 둔 책이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 사회(The Ethics of Authenticity)』(1991)입니다. 우리는 흔히 ‘진정한 나다움’이란 남들 눈치 보지 않고 혼자 힘으로 찾아내는 무언가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테일러는 그게 오해라고 말해요. 내가 누구인지는 진공 속에서 혼자 정해지는 게 아니라,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비로소 또렷해진다고요. 그러니 누군가에게 제대로 알아봐지지 못한다는 건 단순히 서운한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나다움’이 설 자리를 잃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책이 고마운 건, 오늘 버스에서의 그 작은 어긋남이 왜 그냥 흘려보낼 일만은 아닌지를 또렷하게 짚어 준다는 점입니다. 한 사람이 한 일이 누구의 것으로도 돌아오지 않을 때, 거기서 빠져 있는 게 무엇인지를요. 누구를 탓하라는 책이 아닙니다. 다만 알아봐 준다는 작은 행위가 사실은 한 사람을 그 자리에 ‘있게 하는’ 일이라는 걸, 조용히 일깨워 주는 길잡이예요.
저도 어제까지는 그 어긋난 인사를 그저 멋쩍은 해프닝으로만 기억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번 다시 보기 시작하니까, 정작 마음에 걸린 건 받지 못한 인사가 아니라 제가 건넨 인사 쪽이었어요. 제가 누군가에게 “고맙습니다” 할 때, 저는 정말 그 일을 한 사람을 보고 있었을까. 그 자리에 어울려 보이는 사람에게, 너무 쉽게 인사를 돌려보낸 적은 없었을까 하고요.
그러니 오늘 하루, 제가 건넨 ‘고맙습니다’가 정말 그 일을 한 사람에게 가 닿았는지, 한 번만 잠깐 낯설게 되짚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누가 그 일을 했는지 천천히 다시 보는 그 짧은 순간이, 어쩌면 누군가를 비로소 그 자리에 있게 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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