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할 줄 아는데, 할 곳이 없을 때

어느 창구 앞입니다. 한 분이 수어로 용건을 차근차근, 빠짐없이 설명합니다.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서류가 빠졌는지, 언제까지 처리되어야 하는지 — 손끝으로 또렷하게 다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돌아온 답은 짧은 한 줄이었습니다. “죄송하지만, 글로 적어서 다시 오세요.” 혹시 이런 장면, 어디선가 보신 적 있으신가요.

비슷한 장면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습니다. 계단 앞에서 멈춰 선 휠체어, “여기는 전화로만 접수받습니다”라는 안내문 앞에서 발길을 돌리는, 말보다 글이 편한 분. 다 할 줄 아는 사람이 정작 ‘할 곳’이 없어 돌아서는 장면이요. 잠깐 멈춰 보면 어딘가 이상합니다. 그분은 분명 자기 용건을 누구보다 정확히 말했는데, 어째서 ‘다시 오라’는 말을 들어야 했을까요.

막힌 건 사람이었을까요, 창구였을까요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르게 봐볼게요. 창구 앞의 그분은 ‘소통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수어로는 누구보다 분명하게 다 말할 수 있었으니까요. 막힌 건 그분의 능력이 아니라, 그 말을 받아 줄 창구가 거기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능력은 그분 안에 또렷이 있었는데, 그걸 펼칠 길이 바깥에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거죠.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이런 장면을 ‘역량’이라는 눈으로 봅니다. 조금 풀어 말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능력이 정말 그 사람의 것이 되려면, 그 능력이 사람 안에 들어 있는 것만으로는 모자랍니다. 그걸 실제로 펼칠 수 있게 해 주는 바깥 조건 — 길, 통로, 받아 줄 자리 — 까지 함께 갖춰져야 비로소 그 능력은 ‘쓸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헤엄칠 줄 아는 사람도 물이 없으면 헤엄칠 수 없는 것처럼요.

이 시선으로 보면, 존엄이라는 것도 ‘할 줄 아느냐’가 아니라 ‘할 수 있게 길이 열려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게 보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못 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건, 그 사람의 부족이라기보다 그를 받을 칸이 빠진 설계일 때가 많아요. 창구의 직원이 못된 사람이라서가 아닙니다. 그분도 규정대로 정성껏 응대했을 뿐일 테고요. 다만 그 시스템 어디에도 ‘수어로 온 용건을 받는 칸’이 처음부터 그려져 있지 않았던 겁니다.

여기서 한 가지가 또렷해집니다. ‘글로 적어 오세요’는 친절한 말투였을지 몰라도, 그 안에는 한 사람의 멀쩡한 능력을 ‘없는 것’으로 돌려보내는 힘이 있었다는 것. 자리의 빈틈이 그 사람의 부족으로 조용히 바뀌는 순간이죠. 정작 빠져 있던 건 사람의 자질이 아니라, 그 자질을 받아 줄 한 칸이었는데 말입니다.

같은 시선이 닿는 자리들

이렇게 한번 보기 시작하면, 닮은 장면이 하루 곳곳에 스며 있다는 게 눈에 들어옵니다. 직장에서도 그래요. 좋은 생각이 분명한 사람이 있는데, 그 생각을 꺼내 놓을 회의 자리도, 제안을 올릴 통로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부서가 있습니다. 능력이 없어서 조용한 게 아니라, 능력을 펼칠 자리가 없어서 조용한 거예요.

학교에서는 답을 다 아는 아이가, 질문 하나 던질 틈도 없이 진도만 빠르게 흘러가는 교실에 앉아 있기도 합니다. 병원에서는 자기 몸의 상태를 또박또박 설명할 수 있는 어르신이, 짧은 진료 시간과 낯선 용어 앞에서 끝내 “괜찮아요” 하고 일어서기도 하고요. 외국에서 온 이웃이 분명하게 한국어로 물었는데, 창구가 그 발음을 못 알아들어 서류만 되돌아오는 장면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같이, 사람 안의 능력이 모자란 게 아니라 그 능력을 살려 줄 자리가 빠져 있는 장면들입니다. 한 시선이 이렇게 직장에도, 교실에도, 진료실에도, 창구에도 똑같이 번져 있어요. 우리는 자주 ‘저 사람은 왜 저걸 못 하지’라고 묻지만, 정작 물어야 할 건 ‘저 사람을 받을 자리가 거기 있었나’였는지도 모릅니다.

이 시선을 더 들여다보고 싶다면

이 시선을 한 권으로 차분히 펼쳐 둔 책이 마사 누스바움의 『역량의 창조(Creating Capabilities)』(2011)입니다. 누스바움은 이 책에서, 한 사람의 삶이나 한 사회가 잘 되어 가고 있는지를 묻는 방식을 바꿔 보자고 제안합니다. 얼마나 가졌는지, 평균이 얼마인지가 아니라 —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 그 ‘진짜 자유의 폭’으로 보자는 거예요.

이 책이 고마운 건, 오늘 같은 장면에서 무엇이 빠져 있었는지를 또렷하게 비춰 준다는 점입니다. 능력은 있는데 펼칠 길이 막혀 있을 때, 부족했던 건 사람의 자질이 아니라 그 능력을 살려 줄 조건이라는 것 — 그 당연하지만 자주 잊는 사실을 분명하게 짚어 주거든요. 누구를 탓하라는 책이 아니라, 우리가 ‘못 한다’고 불러 온 많은 일들이 실은 ‘못 하게 되어 있던’ 일이었음을 다시 보게 해 주는 길잡이예요.

저도 예전엔 누가 무언가를 못 해내면, 그냥 그 사람이 좀 부족한가 보다 하고 가볍게 넘겼습니다. 줄이 길어지면 느린 사람을, 일이 막히면 서툰 사람을 먼저 떠올렸어요. 그런데 이렇게 한번 다시 보기 시작하니, 그 자리에 애초에 그 사람을 받을 길이 있었는지가 먼저 보이더라고요. 사람을 보던 눈이, 자리를 보는 눈으로 조금 옮겨 간 셈입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 ‘저 사람은 왜 저걸 못 하지’ 싶은 장면을 만나거든 — 잠깐만 낯설게 다시 봐주세요. 정말 그 사람이 못한 걸까요, 아니면 그를 받아 줄 자리가 처음부터 빠져 있던 걸까요. 그리고 한 걸음 더, 혹시 나도 모르게 닫아 둔 창구 하나는 없었는지도요. 그 한 칸이 있고 없고가, 같은 사람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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