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초의 진료실에서, 우리가 만난 것
한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대기실 의자에서 번호가 넘어가는 전광판을 몇 번이나 올려다보고, 제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다 마침내 진료실 문을 밀고 들어섰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고개를 들지 않으셨습니다. 모니터에 뜬 숫자들을 눈으로 훑으시더니, '네, 괜찮네요' 한마디로 진료를 닫으셨어요. 문을 나서기까지 채 20초가 걸리지 않았습니다. 혹시 이런 진료실, 그리 낯설지 않으신가요.
비슷한 장면은 병원 바깥에도 많습니다. 은행 창구에서 번호표를 뽑고 한참을 기다렸다가, 정작 앉으니 직원의 시선은 서류와 화면 사이만 오가고 저는 그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던 순간. 민원 창구에서, 콜센터 너머에서, 제 사정을 다 말하기도 전에 '그건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로 매듭지어지던 순간. 딱히 나쁜 사람을 만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뒤끝이 남습니다.
그날의 서운함을 저는 오래 '너무 짧았다'는 말로만 설명했어요.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마음에 남은 건,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조금 다른 무엇이었습니다.
그 20초를 가만히 되감아 봅니다. 짧았던 것보다 마음에 걸렸던 건, 그 시간 내내 선생님의 눈이 저라는 사람이 아니라 모니터 속 수치에만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이었어요. 검사 결과가 정상이라는 건 참 고마운 일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수치를 몸에 안고, 나름의 걱정을 품은 채 문을 밀고 들어간 '한 사람'이었는데, 그 20초가 마주한 건 사람이 아니라 숫자였던 셈이지요.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우리가 누군가를 두 가지 방식으로 만난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마주 앉은 이를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로 대하는 '나-너'의 만남이고, 다른 하나는 처리해야 할 대상으로만 다루는 '나-그것'의 관계입니다. 어려운 말 같지만 실은 우리 하루에 늘 있는 일이에요. 검사 수치는 '그것'입니다. 처리하고 넘기면 되는 대상이지요. 그런데 그 수치를 안고 들어온 사람은 '너'입니다. 그날 진료실의 20초는, 눈앞의 '너'는 비껴가고 화면 속 '그것'만 만나고 끝난 시간이었던 셈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고 싶습니다. 이건 그 선생님이 무정한 사람이라서 벌어진 일일까요. 저는 점점 그렇게 보지 않게 되었어요. 문 앞에는 이미 다음 환자가 서 있고, 3분 뒤엔 또 그다음 사람이 앉을 진료실입니다. 그 안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너'로 마주하려면 애초에 그럴 시간이 주어져야 하는데, 그 시간은 어쩌면 제도가 미리 잘라내고 없앤 것에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문제의 자리는 어느 개인의 차가움이 아니라, '너'로 만날 여백이 시스템 안에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을 '그것'으로 대하도록 설계된 자리에 앉으면,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그것'의 언어를 쓰게 되니까요. 그날의 서운함은 누구 한 사람을 탓할 감정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너'로 만날 틈이 자꾸 사라지는 구조를 언뜻 알아챈 신호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선을 들고 하루를 둘러보면, 같은 장면이 곳곳에서 눈에 들어옵니다. 회의실에서 제가 낸 의견이 '누가 낸 생각'이 아니라 '처리할 안건'으로만 굴러갈 때, 저는 잠깐 '그것'이 됩니다. 무언가를 '만든 사람'이 아니라 그저 '거쳐 간 통로'로 다뤄질 때의 그 헛헛함이요.
집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가족에게 '오늘 어땠어'라고 물으면서 실은 눈은 휴대폰에 두고 대답을 흘려듣던 저녁. 아이의 성적표 숫자는 또렷이 봤으면서, 정작 그 숫자 뒤에 있는 아이의 하루는 끝내 묻지 못한 순간. 학교에서 아이가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불리고, 병실에서 어른이 이름이 아니라 병상 번호로 불릴 때. 한 사람을 '너'로 마주하는 일은 이렇게 사소한 자리마다 미끄러지기 쉽습니다. 바쁘고 효율을 다투는 하루일수록, '그것'의 언어가 더 자연스럽게 입에 붙고요.
이 시선을 조금 더 오래 들여다보고 싶다면,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Ich und Du, 1923)를 조심스레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부버는 이 얇지만 깊은 책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나-그것'과 '나-너'라는 두 근본적인 관계 방식이 있다고 말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대상을 다루는 '그것'의 태도가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우리가 서로를 그저 '그것'으로만 대하기 시작하면 참된 만남은 소리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지요.
그가 건네는 말은 누군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잃어버리기 쉬운 것을 가만히 가리키는 손끝에 가깝습니다. 진료실의 그 20초를 오래 곱씹게 만든 마음의 정체가 궁금하시다면, 이 책이 그 서운함에 이름을 붙여 줄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저도 그날의 20초를 그저 야속하다고만 여겼어요. 짧았으니까, 성의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부버의 말을 며칠 곱씹고 나서야, 제가 서운했던 진짜 이유가 조금 다른 자리에 있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진료가 짧아서가 아니라, 그 짧은 시간 안에서 끝내 '한 사람'으로 마주 앉지 못해서였더라고요. 그리고 이내 부끄러워졌습니다. 저 역시 오늘 누군가를 앞에 두고, 얼굴이 아니라 용건만 바라본 적이 없었다고 자신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오늘 하루는 이렇게 한 번 되짚어 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오늘 나와 마주 앉았던 사람들 가운데, 내가 '너'로 만난 사람은 몇이나 되고, '용건'으로만 스쳐 보낸 사람은 없었는지. 거창하게 무언가를 바꾸자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다만 다음에 누군가와 마주 앉을 때, 화면에서 잠깐 눈을 떼고 그 사람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는 것. 어쩌면 존엄이라는 건, 그 짧은 눈맞춤 하나에서 조용히 다시 시작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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