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옆으로 흘러갈 때, 지나쳐 간 것

물건을 고르러 매장에 들어섰는데, 직원분이 정작 저는 건너뛰고 옆에 선 일행에게만 말을 거는 순간이 있습니다. 무엇을 찾으시냐는 물음도, 값을 알려주는 말도, 눈길도 전부 옆으로 흘러갑니다. 정작 물건을 고르고 계산을 할 사람은 저인데도요. 휠체어에 앉아 있을 때 유난히 자주 겪는 일이라고들 하지만, 꼭 그 자리가 아니어도 한 번쯤은 스쳐 지나가 보지 않으셨을까요.

비슷한 장면은 뜻밖에 여러 곳에 있습니다. 병원 진료실에서 의사가 정작 아픈 당사자가 아니라 곁에 앉은 보호자에게만 설명을 이어갈 때, 어르신을 앞에 두고 자식들끼리 “어머니가 요즘 통 못 드셔서요” 하고 당사자 없는 대화를 나눌 때, 어린아이를 앞에 세워두고 어른들이 그 아이 이야기를 아이는 못 알아듣는다는 듯 주고받을 때. 분명 그 자리에 있는데, 대화의 상대로는 초대받지 못하는 순간들입니다.

말이 흘러간 방향을 따라가 보면

이 장면에서 딱 하나 — 그 말이 누구를 향해 갔는가 — 그 방향만 가만히 따라가 보고 싶습니다. 무엇을 드릴지 묻는 말도, 눈맞춤도, 값을 알려주는 말도 전부 제 옆 사람에게로 향했습니다. 저는 분명 거기 있었는데, 이야기의 상대로는 한 번도 불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건너뛰어진 것은 제 순서가 아니라, 저를 마주 볼 시선 그 자체였던 셈입니다.

철학자 헤겔은 사람이 한 사람으로 서는 순간을 뜻밖의 자리에 두었습니다. 내가 ‘나’가 되는 것은 혼자 힘으로 이뤄지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 나를 마주 보고 말을 걸어 ‘당신이 여기 있다’고 알아봐 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인정(認定)이라 불렀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볼 때에야 각자가 비로소 ‘나’로 선다는 것 — 그러니까 존엄은 혼자 완성되는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무엇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눈으로 다시 보면, 그날 매장에서 스쳐 지나간 것이 조금 다르게 읽힙니다. 제가 서운했던 건 물건을 못 사서가 아니었습니다. ‘여기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말이 옆으로 흘러가는 그 방향에 함께 스쳐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말을 건넨다는 건 그저 정보를 전하는 일이 아니라, 상대가 여기 있다고 알아봐 주는 일이기도 했던 거예요.

그렇다면 그 직원분이 유독 무례한 사람이었을까요. 저는 그렇게 보고 싶지 않습니다. 아마 그분에게는 ‘설명은 대답할 수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 하는 게 편하다’는 익숙한 습관이 있었을 뿐일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한 사람의 인성이 아니라, 앞에 있는 사람을 먼저 상대로 마주 보게 만드는 그 잠깐의 자리가 어디에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누구를 향해 말할지 한 번 고를 칸이 시스템 안에 비어 있으면, 말은 늘 ‘대답하기 쉬워 보이는 쪽’으로만 흘러가니까요.

같은 시선이 닿는 자리들

이렇게 한번 보기 시작하니, 닮은 장면이 하루 곳곳에서 눈에 들어옵니다. 회의실에서 신입이 낸 의견을, 정작 그 사람은 옆에 둔 채 옆자리 선배에게 “이거 괜찮은가요?” 하고 되물을 때, 의견을 낸 사람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대화에서는 빠져 있습니다.

가게나 관공서에서도 그렇습니다. 외국에서 온 분이 또렷한 한국어로 물었는데도, 답은 옆에 선 한국인 동행에게 돌아갈 때. 집에서도 다르지 않아요. 온 가족이 둘러앉은 자리에서 유독 한 사람만 자꾸 화제 밖으로 밀려, 자기 이야기가 오가는데도 정작 자신은 듣기만 하는 자리에 놓일 때. 하나같이 큰 사건은 아니지만, 그 자리에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다뤄진다는 점에서 서로 닮아 있습니다.

이 시선을 더 들여다보고 싶다면

오늘의 시선과 곧장 맞닿는 책 한 권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1807)입니다. 두껍고 어렵기로 이름난 책이지만, 그 안에는 ‘주인과 노예’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헤겔은 여기서, 아무리 힘 있는 사람이라도 상대를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고 굴복시키기만 하면 결국 자기 자신도 온전한 ‘나’로 서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나를 알아봐 줄 상대를 짓눌러 버리면, 나를 비춰 줄 거울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말은 옆 사람에게 갔지만 나는 분명 그 자리에 있었다’는 순간이 왜 그토록 허전한지, 그 뿌리를 들여다보고 싶으실 때 곁에 둘 만한 책입니다. 존엄이 혼자 완성되는 게 아니라 서로 마주 보는 데서 시작된다는 오래된 통찰이, 오늘 매장에서 스친 짧은 순간과 뜻밖에 이어져 있으니까요.

고백하자면, 저도 얼마 전까지는 이런 일을 겪으면 그저 ‘오늘 좀 무시당했나 보다’ 하고 속으로 삼키고 넘겼습니다. 그런데 말이 오가는 방향을 한번 눈여겨보고 나서는, 이상하게 반대편이 자꾸 떠오르더군요. 여럿이 함께 선 자리에서, 저 역시 대답하기 편한 쪽으로만 말을 건네고 정작 그 일의 당사자는 슬쩍 건너뛴 적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요.

그러니 오늘 하루, 답을 서둘러 내리기보다 한 장면만 가만히 되감아보시면 어떨까요. 내가 누군가에게 건넨 말과 눈길의 끝에는, 정말 그 이야기의 주인이 서 있었는지. 혹시 그 사람을 바로 앞에 두고도, 대답하기 편한 옆 사람에게만 말을 흘려보내고 있지는 않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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