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본 시간에는 아직 이름이 없어서

스무 해였다고 합니다.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고, 열이 오른 아이 곁에서 밤을 지새우고, 이 집이 조용히 굴러가도록 매일 조금씩 손을 보태 온 스무 해. 그 시간을 다 지나 이제야 겨우 어깨를 펴 보려는데,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이런 말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애들 다 키웠으니 그만 놀고, 이제 일 좀 알아봐라.”

그 자리에서는 웃으며 넘기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다른 말은 다 흘러갔는데 유독 한 단어가 목에 걸렸다고 해요. ‘놀다.’ 그 한마디에, 지나온 스무 해가 통째로 ‘아무것도 안 한 시간’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고요. 삼키고 돌아선 그 저녁을,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도 겪어 보신 분이 계실 겁니다.

꼭 살림만의 일은 아닙니다. 정년을 맞고 집에 계신 분께 “요즘 뭐 하고 지내세요?”라고 묻는 순간에도, 오래 곁을 지켜 간병해 온 분께 “이제 좀 편해졌겠네”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비슷한 무언가가 스칩니다. 나쁜 마음으로 한 말이 전혀 아닌데도, 듣는 사람의 지난 시간이 그 한마디에 슬그머니 지워지는 순간들 말입니다. 오늘은 이 장면을, 평소보다 조금 천천히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있던 일이 ‘없던 일’로 불릴 때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사람은 혼자 힘으로 자기 자신이 되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는 곁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비춰 주느냐와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귀하게 봐 줄 때 나는 조금 더 나다워지고, 누군가 나를 하찮게 볼 때 나 역시 조금씩 작아집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에게 잘못된 상(像)을 씌우는 일 —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뒤틀린 모습으로 비춰 주는 일 — 을 그저 예의 없는 실수쯤으로 넘기지 않았습니다. 그건 한 사람의 지난 시간을 조용히 눌러 앉히는 일이 될 수 있으니까요.

이 시선을 얹으면, ‘놀았다’는 그 한마디가 왜 그토록 오래 목에 걸렸는지가 조금 다르게 드러납니다. 서운함의 정체는 아마 ‘고맙다는 말을 못 들어서’가 아닐 겁니다. 밥을 짓고 아이를 돌보고 살림을 굴린 그 시간이 ‘한 시간’이 아니라 ‘안 한 시간’으로 이름이 고쳐 불린 것 — 있던 일이 없던 일이 되어 버린 것, 서운함은 바로 거기서 옵니다. 인정을 못 받은 게 아니라, 잘못 비춰진 것이지요.

그리고 이건 그 말을 건넨 사람이 유독 매정해서 벌어진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우리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밖에 나가 돈을 버는 일에는 ‘직업’이라는 또렷한 이름이 있지만, 집 안에서 사람을 먹이고 돌보고 지켜 온 시간에는 그만한 이름이 마련돼 있지 않습니다. 이름이 없는 일은, 아무리 오래 해도 ‘한 것’으로 셈해지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이 서운함은 누구 한 사람의 무심함이라기보다, 돌본 시간을 ‘돌본 시간’이라고 불러 줄 자리가 우리 곁에 아직 비어 있다는 이야기에 더 가깝습니다.

비어 있는 그 자리는 살림 밖에서도 곳곳에 흔적을 남깁니다. 회사에서 몇 달을 매달린 기획을 마지막에 이름만 바꿔 윗선에 올릴 때, 실제로 그 일을 지어 온 시간은 서류 어디에도 남지 않습니다. 오래 팀을 다독이며 분위기를 지켜 온 사람의 몫은 성과표의 어느 칸에도 적히지 않고요. 학교에서 조용히 제 하루를 챙겨 온 아이가 ‘별다른 사고 없음’으로만 기록될 때도 비슷합니다.

이 장면들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를 낸 일에는 그것을 담을 이름과 칸이 있는데, 무언가가 무너지지 않게 곁에서 떠받쳐 온 일에는 그럴 칸이 좀처럼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떠받친 시간은 자꾸 ‘아무 일도 없던 시간’처럼 보입니다. 누군가 온 힘으로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사실은, 그 어느 칸에도 적히지 않은 채로요.

이 시선을 조금 더 들여다보고 싶으시다면, 찰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 사회』(1991)를 함께 펼쳐 보고 싶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나답게 사는 삶’조차 혼자 힘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내가 나답다는 느낌은 진공 속에서 생기는 게 아니라,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만 온전해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보낸 시간이 나에게 무슨 의미였는지조차 결국 곁의 사람들이 그 시간을 어떻게 비춰 주느냐와 이어져 있음을, 오늘의 장면 위에 잔잔히 겹쳐 읽게 해 주는 책입니다.

저도 얼마 전까지는,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요즘 뭐 하고 지내?”를 참 가볍게 물었습니다. 그저 안부라고 여겼으니까요. 그런데 그 가벼운 물음이 듣는 사람에게는 ‘지금 이렇다 할 무언가가 없는 사람’이라는 확인처럼 되돌아올 수도 있겠다는 걸, 이 장면을 만나고서야 어렴풋이 짐작해 봅니다. 물음이 잘못이었다기보다, 제가 그 사람의 지난 시간을 한 번도 궁금해한 적이 없었던 거죠.

그래서 오늘은 곁에 있는 누군가의 ‘요즘’이 궁금해지거든, 순서를 한 번 바꿔 보려 합니다. 그가 지금 무엇을 안 하고 있는지보다, 지금껏 무엇을 지어 왔는지를 먼저 떠올려 보는 것입니다. 오늘 내 곁의 누군가가 보내는 하루를,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시간’으로 보고 있을까요, 아니면 ‘무엇을 안 하고 있는 시간’으로 보고 있을까요. 시선이 향하는 그 방향 하나가, 어쩌면 그 사람이 자기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지까지 조용히 바꿀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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