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처럼 들린 세 개의 동사
회식이 한 시간쯤 지나 잔이 몇 번 오간 뒤였습니다.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들더니 웃으며 말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참 좋아, 고르기 쉽고 다루기 쉽고 자르기 쉬워서. 테이블에 웃음이 한 바퀴 돌고 잔이 부딪힙니다. 분위기는 조금도 어색해지지 않습니다. 방금 오간 말이 칭찬이었는지 아니었는지 되짚어 보는 사람도 없습니다.
말한 쪽에 나쁜 뜻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술자리에서 흔히 나오는, 자조가 반쯤 섞인 세태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웃은 쪽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웃지 않으면 그 말을 문제 삼는 사람이 되어 버리니, 그 웃음은 동의보다 예의 쪽에 가깝습니다.
비슷한 문장은 회식 자리 밖에도 굴러다닙니다. 누가 그만둔다는 소식에 요즘은 사람 금방 구해진다는 답이 따라붙는 자리, 새로 온 사람을 두고 손이 안 가서 편하다고 말하는 자리 같은 것들 말입니다. 어느 쪽이든 목소리는 가볍고,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이야기는 곧 다음 화제로 넘어갑니다.
세 개의 동사가 원래 있던 자리
고르다, 다루다, 자르다. 이 세 낱말을 한 줄에 놓고 보면 어딘가 익숙합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고르고, 연장을 다루고, 쓸모가 다한 것을 잘라 냅니다. 사람에게 붙기 훨씬 전부터 쓰이던 말들이고, 원래 붙던 자리는 사람 쪽이 아니었습니다.
칸트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두고 원칙 하나를 남겼습니다. 사람을 한낱 수단으로만 다뤄서는 안 되고, 언제나 목적으로도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말처럼 들리지만 뜻은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쓸모로만 셈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저 사람이 무엇에 도움이 되는지 따지기 전에, 그 사람 자체가 이미 셈 안에 들어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수단으로 삼는 일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은 서로 일을 맡기고 도움을 주고받으며 삽니다. 걸리는 것은 '수단으로만'입니다.
그 원칙을 옆에 놓고 아까의 세 마디를 다시 들여다보면, 그 문장에 무엇이 없는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세 마디는 전부 그 사람을 어떻게 처리하기 쉬운가에 관한 말입니다. 고르는 것도, 다루는 것도, 자르는 것도 다른 누군가가 합니다. 정작 그 말의 대상이 된 사람은 문장 어디에서도 무언가를 하는 자리에 서 있지 않습니다. 칭찬처럼 들린 것은 문장이 '좋다'로 끝났기 때문이지, 그 좋음이 그 사람의 몫이어서가 아닙니다.
여기서 한 사람의 입을 탓하고 나면 이야기는 금방 끝납니다. 조금 더 눈여겨볼 만한 것은, 사람을 이야기할 때 우리 손에 쥐어져 있는 말들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 있는가입니다. 조직이 사람을 적어 두는 칸은 대개 얼마나 빨리 뽑을 수 있는가, 얼마나 손이 덜 가는가, 얼마나 정리하기 쉬운가로 되어 있습니다. 세 칸 모두 채우기 쉽고 서로 견주기도 쉽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이 사람은 누구인가를 적을 칸은 어느 서식에도 좀처럼 없습니다. 칸이 없는 이야기는 자리를 잡지 못하고, 칸이 있는 이야기만 농담이 되어 돌아다닙니다.
칭찬의 얼굴을 하고 오는 말들
이런 문장은 회사 밖에서도 자주 들립니다. 학교에서는 손 안 가는 아이라는 말이 좋은 평가로 오갑니다. 조용하고, 되묻지 않고, 시키는 대로 하는 아이라는 뜻입니다. 그 말 어디에도 그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골몰하는지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들어 있는 것은 그 아이를 맡은 쪽의 수고가 얼마나 덜어지는가뿐입니다.
병원이나 돌봄 시설에서 말씀 잘 들으시는 분이라는 소개도 비슷한 자리에 놓입니다. 돌보는 사람의 하루가 고단하니 그 말이 나오는 사정은 짐작이 갑니다. 다만 그 표현이 한 사람을 부르는 가장 흔한 이름이 되어 버리면, 그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견디기 힘들어하는지는 좀처럼 말해지지 않습니다. 집에서도 그렇습니다. 너는 무던해서 참 다행이라는 말은 대개 애정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그 말을 오래 들으면, 무던하지 않은 날의 자기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집니다.
세 장면 모두 누구를 미워해서 생긴 말이 아닙니다. 다들 바쁘고, 바쁠수록 사람을 얼마나 손이 덜 가는가로 줄여 부르는 편이 빠릅니다. 그렇게 줄여 부르는 일이 오래 반복되면, 줄이기 전의 그 사람을 부르던 말은 서서히 쓰이지 않게 됩니다.
이 원칙이 처음 또렷하게 적힌 책이 있습니다. 임마누엘 칸트의 『도덕형이상학 정초』(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1785)입니다. 분량은 얇은 편이지만 도덕이 대체 무엇에 기대어 서 있는지를 밑바닥부터 다시 놓아 보는 책이고, 사람을 한낱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언제나 목적으로도 대하라는 문장이 바로 여기서 나옵니다.
이 책을 오늘의 농담 옆에 나란히 놓아 보면 한 가지가 분명해집니다. 칸트가 붙들고 늘어진 것은 나쁜 마음이 아니라 셈법입니다. 사람을 쓸모의 크기로만 셈하는 방식 자체를 그는 끝까지 밀어붙여 따집니다. 그래서 이 책은 못된 사람을 가려내는 데는 별 쓸모가 없고, 아무도 나쁜 마음을 먹지 않은 자리에서 무엇이 빠져 있었는지를 보는 데 쓰입니다.
저도 이런 말을 여러 번 했습니다. 누군가를 소개하면서 그 사람은 일 맡기기 편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칭찬이라고 생각했고, 그 자리에서도 칭찬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그 문장을 뒤늦게 소리 내어 다시 읽어 보니, 편한 쪽은 그 사람이 아니라 저였습니다. 그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해 보고 싶어 하는지는 제 소개말 안에 한 글자도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돌아보면 사람을 입에 올리는 일은 하루에도 여러 번입니다. 누군가를 설명하고, 부탁하고, 넘겨주고, 소개합니다. 그중 얼마쯤은 상대의 쓸모를 적은 문장이고, 얼마쯤은 상대 자체를 적은 문장이었을 겁니다. 오늘 누군가를 설명해야 했다면 그 설명은 그 사람을 그린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그 사람이 나에게 얼마나 편했는지를 적은 것이었을까요. 그리고 나를 설명하는 말들 가운데, 내가 목적으로 앉아 있는 문장은 몇이나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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