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먼저 끊을 수 없는 쪽
전화가 연결됐고, 목소리는 정중했습니다. 욕설도 없었고 언성이 높아지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문장 하나가 통화의 성격을 바꿔 놓습니다. 해결될 때까지 안 끊겠습니다. 그 말은 협박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실해 보입니다. 그리고 두 시간이 지납니다.
그 두 시간 동안 오간 말들은 하나씩 뜯어보면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저쪽에서도 네, 천천히 하세요. 녹취를 그대로 옮겨 적으면 무례한 대목은 한 줄도 나오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통화가 끝난 뒤에 남는 감각은 이상하게도, 차라리 한 번 크게 화를 내고 끊었으면 나았겠다는 쪽입니다.
비슷한 모양은 다른 데서도 봅니다. 마감 시간이 지난 매장 앞에서 금방이면 된다며 웃으며 묻는 손님. 밤 열한 시에 바쁘시면 내일 답해 주세요라고 덧붙여 보내는 업무 메시지. 어느 쪽도 무례하지 않습니다. 그 무례하지 않음이 오히려 장면을 오래 붙잡아 둡니다.
예의는 분명 있었는데
여기서 눈을 조금 옆으로 옮겨 보면, 흐릿한 것은 예의의 양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그 두 시간의 예의는 누구를 향하고 있었을까요. 문장은 분명 공손했지만, 그 공손함이 닿은 곳은 수화기를 든 한 사람이라기보다 전화를 받는 창구 쪽이었습니다. 창구는 지치지 않습니다. 창구에는 퇴근이 없고, 화장실도 없고, 오늘 저녁 약속도 없습니다. 창구를 상대로는 두 시간이 아니라 네 시간도 정중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사람이 세상을 대하는 방식을 두 갈래로 갈라 봤습니다. 마주 선 한 사람으로 대하는 '나-너', 그리고 내 용무를 처리해 주는 무엇으로 대하는 '나-그것'입니다. 어려운 구분은 아닙니다. 같은 상대를 두고도 그 사이에 사람이 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짚은 지점은 '나-그것'이 나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쪽에 서 있는 동안에는 아무리 말이 고와도 사람과 사람 사이가 열리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에 비어 있는 것은 사과도 매뉴얼도 아닙니다. 수화기 저편에도 끝나는 하루가 있고 견디는 몸이 있다는 사실이 들어설 칸입니다. 끊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은, 상대도 먼저 끊을 수 있는 한 사람이라는 전제가 놓여 있지 않아야 성립합니다. 통화를 먼저 끊을 권한은 한쪽에만 있고, 다른 쪽에는 그렇게 했을 때 기록에 남는 항목이 있습니다.
이것이 누군가의 못됨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나쁜 마음을 먹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가 딛고 선 구조에, 통화를 끝내도 되는 조건을 받는 쪽에서 정할 자리가 없습니다. 언성이 없어 조용했을 뿐, 그 두 시간 안에도 사람을 도구로 세워 둔 빈자리는 그대로였습니다.
전화기 바깥의 같은 자리
이 배치는 수화기 밖에도 있습니다. 병원 접수 창구에서는 설명이 길어질수록 뒤에 선 줄이 길어지고, 창구에 앉은 사람은 그 줄까지 함께 감당합니다. 늦은 회의에서 한 분만 정리해 주시면 됩니다라는 말이 나올 때, 지목된 그 한 사람에게는 정리하지 않을 선택지가 사실상 없습니다.
집 안에도 있습니다. 가족 중에 유독 잘 받아 주는 사람이 있으면 어려운 이야기는 늘 그쪽으로 흘러갑니다. 아무도 그렇게 정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됩니다.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언제 멈출 수 있는지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는 것. 시작하는 조건은 모두가 아는데, 끝내는 조건만 비어 있습니다.
부버가 이 생각을 펼쳐 놓은 책이 『나와 너』(Ich und Du, 1923)입니다. 백 년 전 책이고 두껍지 않은데, 문장이 설명문보다 시에 가까워 한 번에 훑고 지나가기는 어렵습니다. 사람은 세상을 '나-너'로 만나기도 하고 '나-그것'으로 다루기도 하는데, 진짜 관계는 상대를 도구가 아니라 마주 선 한 사람으로 대할 때에야 열린다고 말하는 책입니다.
이 책이 오늘 장면과 닿는 지점은 무례함을 나무라는 대목이 아니라, 정중함만으로는 모자란다고 말하는 대목입니다. 부버에게 '나-그것'은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가려면 세상의 많은 것을 처리하고 다뤄야 하니까요. 다만 거기에만 머물면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봤습니다. 예의 바른 말이 왜 사람에게 닿지 않을 수 있는지를 더 들여다보고 싶다면 펼쳐 볼 만합니다.
저도 어제까지는 이런 장면을 그냥 넘겼습니다. 화를 낸 것도 아니고 말을 함부로 한 것도 아니니 문제 될 게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다 며칠 전 제가 늦은 밤에 보낸 메시지를 다시 열어 봤습니다. 급한 건 아니에요라고 덧붙여 둔 문장이 있었습니다. 그 한 줄로 예의를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그 문장이 실제로 한 일은 답할지 말지의 부담을 상대 쪽에 옮겨 놓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오늘 하루에도 누군가에게 건넨 부탁이나 요구가 있었을 겁니다. 그중에 상대가 여기까지라고 말할 수 있는 자리까지 함께 건넨 것은 몇이나 될까요. 그리고 제가 받는 쪽에 서 있던 시간에는, 그 자리가 저에게 놓여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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