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이 되지 못한 쪽
한동안 일을 쉬었다가 다시 시작해 보기로 마음먹는 날이 있습니다. 그 결심은 대체로 조용하게 옵니다. 오래 안 입던 옷을 꺼내 걸어 두고, 서류 몇 장을 챙기고, 약속한 곳으로 갑니다. 거기까지 오는 데 며칠이 걸렸다는 건, 그 자리에 앉으면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됩니다.
그리고 첫 종이를 받아 듭니다. 마지막으로 일한 날짜를 적고, 그 뒤로 비어 있는 기간을 적고, 해 본 적 없는 업무에 표시를 합니다. 이 부분은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날짜는 정확하고, 공백은 계산이 되고, 안 해 본 일은 세기 쉬우니까요. 종이가 끝날 때쯤이면 제법 많은 것이 채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 어디에도, 이 사람이 지금 무엇을 잘하는 사람인지는 한 줄도 적히지 않은 채입니다.
비슷한 순서를 다른 자리에서도 만납니다. 육아휴직에서 돌아온 첫 면담이 그동안 바뀐 것들과 놓친 것들부터 짚고 시작할 때. 상담 자리의 대화가 무엇을 해 왔느냐가 아니라 왜 그만두었느냐에 오래 머물 때 말입니다.
결핍은 적히고, 가능성은 물어야 나옵니다
그런데 이 종이를 한참 들여다보면 한 가지가 걸립니다. 못 하는 것은 왜 이렇게 쉽게 적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일은 날짜와 '없음'으로 줄일 수 있고, 줄여 놓으면 사람 손을 거치지 않고도 정리됩니다. 반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쪽에 속합니다. 누군가 묻고, 그 대답을 끝까지 듣고, 거기에 시간을 내주어야만 비로소 모습을 드러냅니다.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은 사람의 자유를 바로 이 뒤쪽에서 보았습니다.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넓게 열려 있느냐가 곧 자유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는 물음의 방향을 옮겨 놓습니다. 무엇이 모자라는가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는가로요.
그 눈을 빌려 오늘의 종이를 다시 놓아 보면 이상한 균형이 보입니다. 못 하는 것을 적을 자리는 줄줄이 마련되어 있는데,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물어볼 순서는 그 절차 어디에도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날 확인된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못 한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아직 아무도 묻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빠져 있던 건 능력이 아니라, 그 능력이 나올 수 있는 순서 하나였던 셈입니다.
그리고 이 순서에는 한 겹이 더 있습니다. 자기를 설명해야 하는 종이를 여러 장 지나오다 보면, 사람은 어느 순간 자기 자신도 그 목록으로 읽기 시작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누군가 요즘 뭐 하시냐고 물었을 때, 입에서 먼저 나오는 문장이 '아직 못…'으로 시작하는 것처럼요. 결핍의 문법이 자기소개의 문법 자리까지 옮겨 앉는 일은 대개 아무 소리 없이 일어납니다.
이 순서가 반복되는 곳들
이 배치는 다른 곳에도 있습니다. 시험지에 남는 것은 틀린 문항 쪽입니다. 표시가 있고 번호가 있고 나중에 다시 볼 수 있게 모입니다. 그 아이가 무엇을 유난히 잘 붙드는지는 지나가는 말 한마디로 있다가 사라집니다.
진료 대기실의 종이도 비슷합니다. 어디가 언제부터 불편했는지 적는 칸은 여러 줄인데, 지금 혼자서 어디까지 해내고 있는지는 칸이 아니라 대화 쪽에 걸려 있습니다. 대화는 붐비는 날 가장 먼저 짧아지고요. 오랜만에 모인 가족 자리도 그렇습니다. 안부가 '요즘 어떤 걸 하고 지내세요'로 열리는 날과 '아직 그건 안 됐지'로 열리는 날은, 같은 걱정에서 나왔어도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의 길이가 아주 다릅니다.
여기 어느 자리에서도 누가 야박하게 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손에 가깝습니다. 다만 정확하게 남는 것이 빠진 것들뿐이면, 그 사람에 대해 남는 기록도 결국 빠진 것들의 모음이 됩니다.
이 물음을 정면으로 다룬 책이 아마르티아 센의 『자유로서의 발전』(Development as Freedom, 1999)입니다. 한 사람이, 그리고 한 사회가 잘 지내고 있는지를 소득이나 자원의 양으로 이야기하는 방식을 놓고, 그 숫자가 커지는 동안에도 어떤 사람들의 삶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좀처럼 늘지 않는다는 점을 짚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것을 봅니다. 이 사람은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이 책이 오늘 장면과 닿는 곳은 분발을 권하는 대목이 아닙니다. 능력을 개인이 혼자 지니고 다니는 물건으로 두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한 채 한 자리를 지나갔을 때, 그가 못하는 사람이었는지 할 자리가 없었는지를 갈라서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오늘의 종이 한 장을 더 넓은 자리에 놓고 보고 싶을 때 펼쳐 볼 만한 책입니다.
저는 누군가를 소개받으면 어디까지 해 봤는지부터 확인하는 편이었습니다. 안 해 본 일이 많으면 속으로 조심스러워졌고, 그걸 신중함이라고 불렀습니다. 얼마 전에는 제가 그 확인을 받는 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저에게 물어온 것들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는데, 그 자리를 나오며 오래 남은 건 준비해 간 이야기를 끝내 꺼내지 못했다는 쪽이었습니다.
오늘 하루에도 누군가를 짧게 정리하고 지나간 순간이 있었을 겁니다. 그때 먼저 떠오른 문장은 무엇으로 시작했을까요. 그리고 방향을 돌려서, 오늘 스스로를 설명해야 했던 자리에서는 어땠을까요. 아직 아무도 묻지 않아 그대로 남아 있는 쪽이 있다면, 그건 지금 어디쯤에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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