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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읽히는 칸

경력을 한 장으로 줄이는 데는 며칠이 걸립니다. 어느 해에 무슨 일을 맡았고, 그때 어떤 문제를 어떻게 넘겼는지. 넣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뺀 줄도 있고, 한 줄로 줄이느라 몇 번을 고쳐 쓴 문장도 있습니다. 면접 전날에는 그중에서 제일 자신 있는 이야기 두어 개를 골라 순서까지 정해 둡니다. 그리고 자리에 앉습니다. 인사가 오가고, 서류 넘기는 소리가 나고, 몇 마디가 지나갑니다. 그러다 '나이가 좀…' 하는 말에서 대화의 방향이 바뀝니다. 뒤에 붙는 말은 대개 부드럽습니다. 팀 구성이 좀 젊은 편이라서요, 좋은 자리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준비해 간 이야기 두어 개는 결국 가방 밖으로 나오지 못합니다. 비슷한 자리는 다른 모양으로도 있습니다. 며칠을 들여 넣은 서류에 하루 만에 답이 오는 경우 같은 것 말입니다. 읽는 데 그만한 시간이 걸렸을 리 없는 답장입니다. 어느 쪽이든 돌아오는 길에 오래 남는 건 떨어졌다는 사실보다, 아직 꺼내 놓지 못한 이야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감각 쪽입니다. 먼저 읽히는 칸, 나중에 읽히는 칸 이 장면을 사람 쪽에서 읽으면 이야기가 금방 끝납니다. 편견을 가진 면접관, 나이 든 지원자. 그런데 그 방에 앉은 사람들을 잠시 옆으로 밀어 두고 서류의 생김새 쪽으로 눈을 옮기면 다른 것이 보입니다. 지원서에는 반드시 채워야 하는 칸이 있고, 알아서 쓰는 칸이 있습니다. 생년은 앞쪽 필수 칸입니다. 비워 두면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지 않고, 숫자라서 사람 손을 거치지 않고도 정렬됩니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대개 뒤쪽 자유 서술 칸입니다. 사람이 눈으로 읽어야 읽히고, 읽는 데 시간이 듭니다. 한쪽은 삼 초면 처리되고, 다른 한쪽은 삼십 분과 사람 한 명을 필요로 합니다. 바쁜 날에 어느 칸이 먼저 일을 하게 되는지는 그 방의 인심이 아니라 서식의 순서가 정해 둡니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사람을 볼 때 두 가지를 나누어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해 볼 자리가 열려 있는...

문 앞에서 켜지는 3초

회의 시작 몇 분 전, 복도에서 휴대폰을 꺼냅니다. 잠금을 풀고, 녹음 앱을 열고, 버튼을 한 번 누릅니다. 화면 위쪽에 빨간 점이 켜지고 숫자가 0초부터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넣습니다. 그러고 문을 엽니다. 안에서는 평소처럼 인사가 오가고, 자료가 넘어가고, 종이컵 뚜껑이 열립니다. 방금 복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 순서가 언제 생겼는지는 정작 본인도 또렷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날 하지 않은 말이 한 것으로 정리되어 돌아왔거나, 함께 정한 일이 어느새 혼자 정한 일이 되어 있었거나 했겠지요. 그날 이후로 문 앞에서는 손이 먼저 움직입니다. 3초면 끝나는 일이고, 밖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비슷한 손짓은 회의실 밖에도 흩어져 있습니다. 전화를 받기 전에 통화 녹음이 켜져 있는지 확인하는 손, 메신저 대화를 캡처해 따로 모아 두는 손, 방금 말로 들은 지시를 굳이 메일로 한 번 더 적어 보내며 참조란에 이름 하나를 더 넣는 손. 하나같이 조용하고, 하나같이 짧습니다. 조심하는 손과, 그 손이 들어서는 방 이 손짓들을 성격으로 정리하면 이야기는 금방 끝납니다. 좀 예민한 사람, 사람을 잘 못 믿는 사람. 그런데 녹음이라는 것이 원래 어디에 쓰이던 물건인지 옆에 놓아 보면 다른 것이 보입니다. 녹음은 대개 남겨 두고 싶은 것을 담습니다. 아이 목소리, 좋아했던 공연, 나중에 다시 듣고 싶은 강의. 담아 둔 것을 언젠가 꺼내 들으려고 켭니다. 그런데 문 앞에서 켜지는 녹음은 꺼내 들을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켜집니다. 담는 쪽이 아니라 대비하는 쪽입니다. 이스라엘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은 좋은 사회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의 마음씨보다 제도 쪽을 봅니다. 그가 말한 '품위 있는 사회'는 사람들이 서로 친절한 사회가 아니라,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입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모욕하지 않는 일과,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 일을 그는 따로 떼어 둡니다. 앞의 것은 각자의 몫이고,...

칭찬처럼 들린 세 개의 동사

회식이 한 시간쯤 지나 잔이 몇 번 오간 뒤였습니다.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들더니 웃으며 말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참 좋아, 고르기 쉽고 다루기 쉽고 자르기 쉬워서. 테이블에 웃음이 한 바퀴 돌고 잔이 부딪힙니다. 분위기는 조금도 어색해지지 않습니다. 방금 오간 말이 칭찬이었는지 아니었는지 되짚어 보는 사람도 없습니다. 말한 쪽에 나쁜 뜻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술자리에서 흔히 나오는, 자조가 반쯤 섞인 세태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웃은 쪽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웃지 않으면 그 말을 문제 삼는 사람이 되어 버리니, 그 웃음은 동의보다 예의 쪽에 가깝습니다. 비슷한 문장은 회식 자리 밖에도 굴러다닙니다. 누가 그만둔다는 소식에 요즘은 사람 금방 구해진다는 답이 따라붙는 자리, 새로 온 사람을 두고 손이 안 가서 편하다고 말하는 자리 같은 것들 말입니다. 어느 쪽이든 목소리는 가볍고,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이야기는 곧 다음 화제로 넘어갑니다. 세 개의 동사가 원래 있던 자리 고르다, 다루다, 자르다. 이 세 낱말을 한 줄에 놓고 보면 어딘가 익숙합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고르고, 연장을 다루고, 쓸모가 다한 것을 잘라 냅니다. 사람에게 붙기 훨씬 전부터 쓰이던 말들이고, 원래 붙던 자리는 사람 쪽이 아니었습니다. 칸트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두고 원칙 하나를 남겼습니다. 사람을 한낱 수단으로만 다뤄서는 안 되고, 언제나 목적으로도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말처럼 들리지만 뜻은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쓸모로만 셈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저 사람이 무엇에 도움이 되는지 따지기 전에, 그 사람 자체가 이미 셈 안에 들어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수단으로 삼는 일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은 서로 일을 맡기고 도움을 주고받으며 삽니다. 걸리는 것은 '수단으로만'입니다. 그 원칙을 옆에 놓고 아까의 세 마디를 다시 들여다보면, 그 문장에 무엇이 없는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세 마디는 전부 그 사람을...

인사는 오갔는데, 누구에게서 왔는지는

건물 현관에서 마침 아는 얼굴과 마주쳤습니다. 며칠 타이밍을 놓치고 지나쳤던 참이라, 이번에는 큰맘 먹고 먼저 소리를 냈습니다. 안녕하세요, 하고요. 그런데 그분의 눈이 제 얼굴에 잠깐 머무는가 싶더니 제 어깨 너머로 옮겨 갑니다. 뒤에 서 있던 사람에게요. 반가운 목소리의 답례가 그쪽으로 갑니다. 그 몇 초 동안 저는 손을 어디에 둘지 몰랐습니다. 못 들으셨나 싶어 한 번 더 소리를 낼까 하다가, 그러면 더 이상해질 것 같아 그냥 걸음을 옮겼습니다. 크게 기분 상할 일도 아니고, 종일 담아 둘 일도 아닙니다. 다만 자리에 앉고 나서도 뻘쭘한 기분이 조금 오래 남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도 비슷한 몇 초가 지나갑니다. 여럿이 함께 탄 자리에서 목례를 하면, 상대는 저를 지나 안쪽에 선 분과 인사를 주고받습니다. 겪어 보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장면은 대개 이름 붙일 것도 없이 지나갑니다. 인사는 한 번이 아니라 왕복입니다 인사를 소리 두 번이 오간 일로 보면, 이 장면에는 빠진 것이 없습니다. 인사가 있었고 답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반 박자를 천천히 늘려 놓고 보면, 인사에서 실제로 오가는 것은 소리가 아닙니다. 제가 건넨 말에 상대가 답을 할 때, 그 답에는 '당신이 저를 불렀군요'라는 확인이 함께 실려 돌아옵니다. 그 확인이 도착해야 인사 한 번이 닫힙니다. 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사람이 사람으로 서는 그 일을 '인정(Anerkennung)'이라고 불렀습니다. 말은 딱딱하지만 뜻은 단순합니다. 내가 한 일과 내가 건넨 것이 '나에게서 왔다'고 되돌아올 때, 사람은 비로소 한 사람으로 선다는 생각입니다. 되돌아오지 않으면 그 말은 허공에 흩어지는 게 아니라, 어디론가 가긴 갔는데 나에게서 출발했다는 사실만 떨어져 나갑니다. 그 눈으로 현관 앞의 몇 초를 다시 놓아 보면, 없었던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소리는 두 번 다 났고, 표정도 밝았습니다. 다만 그 답이 되돌아온 곳이 처음 소리를 낸 사람 쪽은 아니...

'스스로'라는 말이 이미 셈해 둔 것

햄버거 하나 먹으려고 매장 문을 열면, 사람보다 화면이 먼저 앞에 섭니다. 첫 장부터 누를 것이 촘촘히 펼쳐집니다. 신메뉴 안내가 한 번 지나가고, 매장에서 드실지 가져가실지를 묻고, 사이드는 무엇으로 바꿀지를 묻습니다. 그러는 사이 뒤로는 줄이 한 사람씩 늘어납니다.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 잠깐 멈춰 서면, 그 몇 초가 유난히 길어집니다. 기다리는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먼저 오고, 손끝은 그만큼 더 굳습니다. 결국 아무것도 시키지 못한 채 문을 나섰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한 번쯤 들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병원 로비의 무인 접수기 앞에서도, 역 대합실의 발매기 앞에서도 비슷한 몇 초가 지나갑니다. 그리고 이런 장면은 대개 '요즘 세상이 그렇지' 한마디로 정리되고 넘어갑니다. 허락과 해낼 수 있음 주문 화면 맨 위에는 대개 '터치하여 시작하세요' 같은 안내가 떠 있습니다. 누구나 스스로 고르고, 스스로 담고, 스스로 결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문장만 보면 막아 놓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은 자유를 조금 다른 자리에서 보았습니다. 무언가를 해도 된다고 허락되어 있는 것과, 어떤 사람이 그것을 실제로 해낼 수 있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문이 열려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아직 아무것도 말해지지 않습니다. 그 문턱을 넘을 수 있는지가 함께 물어질 때 비로소 자유라고 부를 만한 것이 됩니다.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곧 자유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눈으로 화면 위의 문장을 다시 읽으면, 문장 뒤에 조용히 붙어 있는 조건들이 보입니다. 화면이 어떤 순서로 넘어갈지 짐작하는 눈. 정해진 시간 안에 하나를 고르는 손. 그리고 뒤에 늘어선 줄 앞에서 서두르지 않을 여유. 화면은 이 조건들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요구하지 않는다는 건 없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갖춰져 있다고 셈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 셈이 빗나간 사람에게는 무엇이 남을까요. 예전에는 모르면 물어볼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부름 안에 이름이 없을 때

저녁 여덟 시, 홀이 가장 붐비는 시간입니다. 카운터 안쪽에 서 있으면 손님보다 목소리가 먼저 도착합니다. "야! 알바!" 뒤이어 오는 말은 두 마디뿐입니다. "소주." 그리고 잠시 뒤 "계산." 거친 말은 아닙니다. 욕이 섞인 것도, 목소리를 높인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군더더기 하나 없이 필요한 만큼만 말한 문장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서 본 사람들은 그 몇 초가 이상하게 오래 남는다고 말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하기에는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기에는 무언가 남습니다. 편의점 계산대에서도, 주유소에서도, 문 앞에 선 배달 기사에게도 비슷한 부름이 오갑니다. "여기요"가 붙으면 그나마 나은 편이고, 바쁠 때는 그것마저 생략됩니다. 세 마디가 가리킨 것들 오간 말을 종이에 적어 보면 세 덩어리입니다. 호명 하나, 물건 하나, 절차 하나. "소주"는 진열대 위의 물건을 가리킵니다. "계산"은 지금 처리되어야 할 순서를 가리킵니다. "알바"는 그 물건과 순서를 처리하는 기능을 가리킵니다. 세 마디 모두 무언가를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습니다. 다만 셋 중 어느 것도 카운터 안쪽에 서 있는 사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이 오래 붙들고 있던 말이 '존중'입니다. 그가 말하는 존중은 예절 교육을 잘 받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존중은 공기처럼 떠다니다 저절로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먼저 건네야 비로소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건네지 않으면 생기지 않습니다. 나쁜 마음이 있어야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건네지 않으면 그냥 없는 채로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장면에서 빠져 있던 것은 예의범절이 아닌 듯합니다. 예의범절이라고 하면 이야기가 곧장 사람의 됨됨이로 좁아지고, 부른 사람 한 명을 나무라는 데서 끝납니다. 그보다 먼저 눈에 걸리는 건 다른 쪽입니...

종이에서 눈을 드는 데 걸리는 시간

진료실 앞 의자에 한 시간쯤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대기실에 앉아 있는 동안에는 물어볼 것을 속으로 몇 가지 꼽아 두게 됩니다. 언제부터 이랬는지, 밤에 자다 깨는 것도 이것과 관련이 있는지. 이름이 불리고 문이 열립니다. 선생님은 화면에 뜬 결과지를 한참 들여다봅니다. 숫자는 빠짐없이 읽히고, 곧 "이상 없네요" 한마디가 나옵니다. 처방이 나가고 문이 닫힙니다. 꼽아 두었던 것들은 그대로 남아 함께 밖으로 나옵니다. 복도를 몇 걸음 걷다가 "아, 그걸 물어본다는 게" 하고 떠오르는 순간이 있습니다. 다시 들어가기에는 이미 다음 이름이 불린 뒤입니다. 종이는 다 읽혔는데 이 장면에서 시선이 어디에 머물렀는지만 따라가 보겠습니다. 그 몇 분 동안 가장 오래 머문 눈길은 사람이 아니라 결과지 위에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결과지를 읽은 일이 잘못은 아닙니다. 오히려 꼼꼼히 읽혔습니다. 읽어야 할 것은 다 읽혔는데, 그 종이가 애초에 담을 수 없는 것들만 밖에 남았습니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사람이 무언가를 대하는 방식을 두 갈래로 나눠 불렀습니다. '나-너'와 '나-그것'입니다. 앞에 있는 것을 읽고 확인하고 처리하면 끝나는 하나의 대상으로 대하는가, 아니면 나를 마주 보고 있는 한 사람으로 대하는가의 차이입니다. 결과지는 '그것'입니다. 수치는 읽으면 되고, 읽고 나면 할 일이 정해집니다. 종이를 '그것'으로 대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그 종이가 끝내 담지 못하는 한 줄이 있습니다. '오늘 여기 앉은 이 사람이 무엇을 묻고 싶어서 한 시간을 기다렸는가.' 이 줄은 어떤 검사로도 나오지 않습니다. 종이에서 눈을 들어 마주 볼 때에만 열립니다. 부버의 말로 옮기면, 상대를 '너'로 대하는 그 한 번의 순간에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마주봄은 왜 자주 빠질까요. 누군가의 무심함으로 돌리면 이야기가 간단해지지만, 그렇게 보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