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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매도 괜찮은 한 칸 — 무인 계산대 앞에서 다시 본 품위

무인 계산대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화면을 몇 번 눌러 보다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결국 고개를 들어 직원을 찾습니다. “이거 어떻게 해요?” 돌아온 첫마디는 설명이 아니었습니다. “뒤에 밀려요.” 그 목소리는 물어본 사람에게서 멈추지 않았고, 뒤에 선 사람들이 모두 함께 들었습니다. 그 줄에 서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뒤에서 기다리던 쪽이었을 수도 있고, 화면 앞에서 손을 멈춘 쪽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주차 정산기 앞에서 카드 넣는 곳을 찾느라 뒤차의 시선이 등에 닿던 순간, 처음 가 본 식당의 태블릿 메뉴판에서 주문 버튼을 못 찾아 괜히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순간도 닮았습니다. 그런 때 사람을 가장 작게 만드는 건 모른다는 사실보다, 모르는 모습이 남들 앞에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이 장면은 대개 ‘그 직원이 불친절했다’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정리하고 나면 빠지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이 닿은 범위 조금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겠습니다. “뒤에 밀려요”라는 말은 따지고 보면 틀린 안내가 아닙니다. 실제로 줄은 밀리고 있었을 테니까요. 걸리는 건 그 말이 한 사람에게 건네지는 대신 줄 전체에 울렸다는 점입니다. 같은 문장이라도 곁에서 낮게 건네졌다면 안내였겠지만, 모두가 듣는 자리에서 울리면 그 사람을 ‘줄을 막는 사람’으로 세워 두는 일이 됩니다.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를, 그 사회의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라고 설명했습니다. 그가 눈여겨본 대목은, 사람들끼리 서로 모욕하지 않는 것과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 것을 나누어 보았다는 데 있습니다. 한 사람의 말투는 그 사람의 몫이지만, 누군가를 남들 앞에서 작아지게 만드는 자리가 날마다 되풀이된다면 그건 누군가의 성격보다 그 자리가 짜인 방식을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보면 계산대 곁의 직원도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기계 여러 대를 혼자 맡고, 줄은 길어지고, 한 사람 곁에 오래 머물 틈은 없습니다. 무인 계...

자리가 비는 일과 사람이 떠나는 일

그만두겠다는 말은 대개 한 번에 나오지 않습니다. 언제 꺼낼지, 첫 문장을 무엇으로 할지 몇 번이고 고른 끝에야 겨우 입 밖으로 나오지요. 그렇게 꺼낸 말에 “안 맞으면 다른 사람 뽑으면 되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저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건넨 한마디였습니다. 비슷한 장면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퇴사 소식이 알려진 그 주에 같은 자리의 채용 공고가 먼저 올라오는 일, 송별 인사보다 인수인계 양식이 먼저 도착하는 일. 어느 쪽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일은 계속되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이상하지 않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그 순간에 무엇이 조용히 지나갔는지는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자리를 채우는 말, 사람을 향한 말 이 장면을 조금 다른 쪽에서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18세기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사람을 결코 한낱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도 대하라고 했습니다. 흔히 ‘목적의 정식’이라 부르는 원칙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글자는 ‘만’입니다. 사람이 서로에게 수단이 되는 일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는 날마다 누군가의 일에 기대어 삽니다. 문제는 한 사람이 오직 기능으로만, 어떤 자리를 채우는 무엇으로만 여겨질 때입니다. 이 원칙 곁에 ‘다른 사람 뽑으면 되지’라는 대답을 놓아 보겠습니다. 그 대답이 실제로 응답하고 있는 질문은 “이제 이 일은 누가 하지?”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또 하나의 질문이 함께 놓여 있었습니다. 지금 떠나겠다고 말한 이 사람은 그동안 여기서 무엇을 해 왔고, 왜 떠나려 하는가. 앞의 질문에만 답이 돌아오고 뒤의 질문은 아무도 꺼내지 않은 채 대화가 끝났다면, 그 장면에서 비어 있던 건 바로 두 번째 질문의 자리입니다. 이 원칙을 세운 같은 책에는 이런 구분도 나옵니다. 같은 값어치의 다른 것으로 바꿔 놓을 수 있는 것에는 값이 있고,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에는 존엄이 있다는 구분입니다. 역할은 앞쪽에 속합니다. 같은 일을 해낼 사람은 언젠가 구...

질문이 길을 바꾼 뒤에

아침에 자리에 앉습니다. 예전 같으면 컴퓨터가 채 켜지기도 전에 누가 옆에 와 섰습니다. 이거 전에 한번 있었던 건 같은데 그때 어떻게 처리했었죠, 하고요. 오전에 두어 번, 오후에도 비슷하게. 그러다 보면 하루가 갔습니다. 요즘은 하루가 다 가도록 그런 발걸음이 오지 않습니다. 사무실이 한가해진 것도 아닙니다. 옆에서 누가 막혀 한숨 쉬는 소리도 들립니다. 다만 그 다음 발걸음이 이쪽으로 오지 않을 뿐입니다. 정년이 가까워졌다는 이야기가 한 바퀴 돈 뒤로는 더 그렇습니다. 사내 메신저 방에서도 비슷한 순간이 옵니다. 누군가 질문을 올리고 잠시 뒤 다른 사람이 답을 답니다. 그 답을 읽다가, 저건 그렇게만 하면 나중에 한 번 더 걸리는데, 하는 생각이 스칩니다. 자판 위에 손이 잠깐 머물다 그냥 내려옵니다. 물음은 줄지 않았습니다 이런 하루는 보통 서운함이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그런데 조금 떨어져서 보면 그날 물음 자체가 줄어든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오늘도 막혔고, 막힌 사람은 어딘가에 묻습니다. 물음의 양은 그대로인데 도착하는 곳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이제 그것들은 매뉴얼로 가고, 검색창으로 가고, 새로 온 담당자에게로 갑니다. 헤겔은 사람의 자기의식이 혼자 힘으로 서지 않는다고 봤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봐 줄 때 비로소 선다고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대목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는 내 안에서 완성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한 번 거쳐 나에게 돌아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눈으로 보면 '이건 저분이 잘 안다'는 자리는 한번 얻어 두면 계속 가지고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누군가 찾아와 물어 줄 때마다 새로 세워지는 자리에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묻는 일은 정보를 얻는 일만은 아닙니다. 그 사람을 아는 사람으로 한 번 더 세워 두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눈이 서류 쪽으로 갑니다. 인수인계서에는 적을 자리가 정해져 있습니다. 맡던 업무, 진행 중인 건, 파일이 있는 위치, 연락해야 할 곳. 전부 옮겨지는 것들의 목록입니...

목록이 되지 못한 쪽

한동안 일을 쉬었다가 다시 시작해 보기로 마음먹는 날이 있습니다. 그 결심은 대체로 조용하게 옵니다. 오래 안 입던 옷을 꺼내 걸어 두고, 서류 몇 장을 챙기고, 약속한 곳으로 갑니다. 거기까지 오는 데 며칠이 걸렸다는 건, 그 자리에 앉으면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됩니다. 그리고 첫 종이를 받아 듭니다. 마지막으로 일한 날짜를 적고, 그 뒤로 비어 있는 기간을 적고, 해 본 적 없는 업무에 표시를 합니다. 이 부분은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날짜는 정확하고, 공백은 계산이 되고, 안 해 본 일은 세기 쉬우니까요. 종이가 끝날 때쯤이면 제법 많은 것이 채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 어디에도, 이 사람이 지금 무엇을 잘하는 사람인지는 한 줄도 적히지 않은 채입니다. 비슷한 순서를 다른 자리에서도 만납니다. 육아휴직에서 돌아온 첫 면담이 그동안 바뀐 것들과 놓친 것들부터 짚고 시작할 때. 상담 자리의 대화가 무엇을 해 왔느냐가 아니라 왜 그만두었느냐에 오래 머물 때 말입니다. 결핍은 적히고, 가능성은 물어야 나옵니다 그런데 이 종이를 한참 들여다보면 한 가지가 걸립니다. 못 하는 것은 왜 이렇게 쉽게 적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일은 날짜와 '없음'으로 줄일 수 있고, 줄여 놓으면 사람 손을 거치지 않고도 정리됩니다. 반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쪽에 속합니다. 누군가 묻고, 그 대답을 끝까지 듣고, 거기에 시간을 내주어야만 비로소 모습을 드러냅니다.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은 사람의 자유를 바로 이 뒤쪽에서 보았습니다.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실제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넓게 열려 있느냐가 곧 자유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는 물음의 방향을 옮겨 놓습니다. 무엇이 모자라는가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는가로요. 그 눈을 빌려 오늘의 종이를 다시 놓아 보면 이상한 균형이 보입니다. 못 하는 것을 적을 자리는 줄줄이 마련되어 있는데,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물어볼 순서는 ...

낮은 목소리가 놓일 자리

계산대 단말기가 한 번 '삑' 하고 카드를 튕겨 냅니다. 화면에는 승인이 되지 않았다는 문구가 뜹니다. 여기까지는 아주 흔한 일입니다. 한도일 수도 있고, 통신이 잠깐 끊겼을 수도 있고, 카드 뒷면이 긁혔을 수도 있습니다. 대개는 다른 카드를 꺼내면 그만인 일이죠. 장면을 바꾸는 것은 그다음 몇 초입니다. 점원이 고개를 들고, 줄 선 사람들에게까지 닿는 크기로 말합니다. 이 카드 안 되시는데요, 다른 카드 없으세요. 말 자체에는 가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계산대를 넘어가는 순간, 카드 한 장의 문제였던 것이 한 사람에 관한 정보로 바뀝니다. 비슷한 몇 초는 다른 곳에도 있습니다. 개찰구에서 잔액 부족 알림이 크게 울릴 때, 식당 입구에서 예약이 확인되지 않을 때. 아무도 화를 내지 않았고 누구도 창피를 주려 하지 않았는데, 뒤에 선 사람들의 시선이 한 사람의 등 뒤로 모입니다. 커진 것은 목소리가 아니라 범위였습니다 한 걸음 물러서서 보면 이상한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결제 실패는 원래 기계와 카드 사이에서 끝날 수 있는 일입니다. 필요한 정보는 거의 다 화면 안에 있고, 화면을 손님 쪽으로 살짝 돌리거나 낮게 한마디 건네는 것으로 충분히 정리됩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는 계산대도 많습니다. 그러니 이 장면에서 달라진 것은 사건의 크기가 아니라, 그 사건이 공유된 범위입니다. 리처드 세넷은 이런 자리를 '존중'이라는 말로 오래 들여다본 사람입니다. 형편과 처지가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상대를 깎아내리지 않고 대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는 것이죠. 그가 붙든 것은 마음씨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친절한 사람과 무례한 사람으로 세상을 나누어 놓으면 설명되지 않는 장면이 너무 많으니까요. 그렇게 보면 이 계산대에 비어 있는 것도 점원의 배려심은 아닙니다. 작은 실패를 조용히 처리할 자리, 낮은 목소리를 놓아둘 한 칸이 애초에 그곳에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매장의 동선은 빠른 회전을 향해 설계되어 있고, 계산대는 대개 ...

전화를 먼저 끊을 수 없는 쪽

전화가 연결됐고, 목소리는 정중했습니다. 욕설도 없었고 언성이 높아지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문장 하나가 통화의 성격을 바꿔 놓습니다. 해결될 때까지 안 끊겠습니다. 그 말은 협박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실해 보입니다. 그리고 두 시간이 지납니다. 그 두 시간 동안 오간 말들은 하나씩 뜯어보면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저쪽에서도 네, 천천히 하세요. 녹취를 그대로 옮겨 적으면 무례한 대목은 한 줄도 나오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통화가 끝난 뒤에 남는 감각은 이상하게도, 차라리 한 번 크게 화를 내고 끊었으면 나았겠다는 쪽입니다. 비슷한 모양은 다른 데서도 봅니다. 마감 시간이 지난 매장 앞에서 금방이면 된다며 웃으며 묻는 손님. 밤 열한 시에 바쁘시면 내일 답해 주세요라고 덧붙여 보내는 업무 메시지. 어느 쪽도 무례하지 않습니다. 그 무례하지 않음이 오히려 장면을 오래 붙잡아 둡니다. 예의는 분명 있었는데 여기서 눈을 조금 옆으로 옮겨 보면, 흐릿한 것은 예의의 양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그 두 시간의 예의는 누구를 향하고 있었을까요. 문장은 분명 공손했지만, 그 공손함이 닿은 곳은 수화기를 든 한 사람이라기보다 전화를 받는 창구 쪽이었습니다. 창구는 지치지 않습니다. 창구에는 퇴근이 없고, 화장실도 없고, 오늘 저녁 약속도 없습니다. 창구를 상대로는 두 시간이 아니라 네 시간도 정중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사람이 세상을 대하는 방식을 두 갈래로 갈라 봤습니다. 마주 선 한 사람으로 대하는 '나-너', 그리고 내 용무를 처리해 주는 무엇으로 대하는 '나-그것'입니다. 어려운 구분은 아닙니다. 같은 상대를 두고도 그 사이에 사람이 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짚은 지점은 '나-그것'이 나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쪽에 서 있는 동안에는 아무리 말이 고와도 사람과 사람 사이가 열리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에 ...

회의록에 없는 한 줄

회의가 시작되기 십 분쯤 전이었습니다. 탕비실에서 커피를 따르다가, 요즘 걸리던 문제를 이렇게 풀면 어떨까 하고 툭 말을 꺼냈습니다. 정리된 문장도 아니었고, 어디 적어 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옆에 있던 분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걸로 끝인 줄 알았습니다. 회의가 시작되고 한참 뒤에 그 말이 다시 나왔습니다. 제 입에서가 아니라 앞자리에서, 아까보다 훨씬 매끄럽게 정리된 문장으로요. 좋은 생각이라는 반응이 몇 마디 오갔고, 회의는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습니다. 그 몇 초 동안 손을 들까 말까 망설였지만 결국 들지 않았습니다. 그거 아까 제가 한 말인데요, 라고 하기엔 시점이 지났고, 무엇보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제가 작아 보일 것 같았습니다. 비슷한 자리는 다른 모양으로도 있습니다. 초안을 만들어 공유 문서에 올려 두면 여러 사람의 손이 지나가고, 최종본 맨 위에는 마지막으로 저장한 사람의 이름이 남습니다. 아무도 무엇을 가져가지 않았는데, 문서를 열어 보면 이것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는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사라진 것은 아이디어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눈은 대개 그 윗사람 쪽으로 먼저 갑니다. 그런데 그쪽만 오래 보고 있으면 놓치는 게 하나 있습니다. 그날 그 아이디어는 아주 잘 지냈다는 사실입니다. 회의에서 멀쩡히 쓰였고, 좋은 평가까지 받았고, 아마 다음 주에는 일정표 어딘가에 자리를 잡았을 겁니다. 없어진 것은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사람이 '나'로 서는 일을 혼자 하는 일로 보지 않았습니다. 내가 한 일이 다른 사람을 한 번 지나 다시 나에게 도착할 때,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조금씩 또렷해진다고 봤습니다. 그러니 그날 돌아오지 않은 것은 칭찬 한마디가 아닙니다. 무언가를 처음 만들어 낸 사람으로 그 자리에 등록될 기회 쪽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눈이 회의록으로 옮겨 갑니다. 회의록에는 적어야 할 자리가 정해져 있습니다. 안건, 결정된 것, 맡을 사람, 언제까지. 전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적는 자...

먼저 읽히는 칸

경력을 한 장으로 줄이는 데는 며칠이 걸립니다. 어느 해에 무슨 일을 맡았고, 그때 어떤 문제를 어떻게 넘겼는지. 넣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뺀 줄도 있고, 한 줄로 줄이느라 몇 번을 고쳐 쓴 문장도 있습니다. 면접 전날에는 그중에서 제일 자신 있는 이야기 두어 개를 골라 순서까지 정해 둡니다. 그리고 자리에 앉습니다. 인사가 오가고, 서류 넘기는 소리가 나고, 몇 마디가 지나갑니다. 그러다 '나이가 좀…' 하는 말에서 대화의 방향이 바뀝니다. 뒤에 붙는 말은 대개 부드럽습니다. 팀 구성이 좀 젊은 편이라서요, 좋은 자리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준비해 간 이야기 두어 개는 결국 가방 밖으로 나오지 못합니다. 비슷한 자리는 다른 모양으로도 있습니다. 며칠을 들여 넣은 서류에 하루 만에 답이 오는 경우 같은 것 말입니다. 읽는 데 그만한 시간이 걸렸을 리 없는 답장입니다. 어느 쪽이든 돌아오는 길에 오래 남는 건 떨어졌다는 사실보다, 아직 꺼내 놓지 못한 이야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감각 쪽입니다. 먼저 읽히는 칸, 나중에 읽히는 칸 이 장면을 사람 쪽에서 읽으면 이야기가 금방 끝납니다. 편견을 가진 면접관, 나이 든 지원자. 그런데 그 방에 앉은 사람들을 잠시 옆으로 밀어 두고 서류의 생김새 쪽으로 눈을 옮기면 다른 것이 보입니다. 지원서에는 반드시 채워야 하는 칸이 있고, 알아서 쓰는 칸이 있습니다. 생년은 앞쪽 필수 칸입니다. 비워 두면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지 않고, 숫자라서 사람 손을 거치지 않고도 정렬됩니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대개 뒤쪽 자유 서술 칸입니다. 사람이 눈으로 읽어야 읽히고, 읽는 데 시간이 듭니다. 한쪽은 삼 초면 처리되고, 다른 한쪽은 삼십 분과 사람 한 명을 필요로 합니다. 바쁜 날에 어느 칸이 먼저 일을 하게 되는지는 그 방의 인심이 아니라 서식의 순서가 정해 둡니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사람을 볼 때 두 가지를 나누어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해 볼 자리가 열려 있는...

문 앞에서 켜지는 3초

회의 시작 몇 분 전, 복도에서 휴대폰을 꺼냅니다. 잠금을 풀고, 녹음 앱을 열고, 버튼을 한 번 누릅니다. 화면 위쪽에 빨간 점이 켜지고 숫자가 0초부터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넣습니다. 그러고 문을 엽니다. 안에서는 평소처럼 인사가 오가고, 자료가 넘어가고, 종이컵 뚜껑이 열립니다. 방금 복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 순서가 언제 생겼는지는 정작 본인도 또렷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날 하지 않은 말이 한 것으로 정리되어 돌아왔거나, 함께 정한 일이 어느새 혼자 정한 일이 되어 있었거나 했겠지요. 그날 이후로 문 앞에서는 손이 먼저 움직입니다. 3초면 끝나는 일이고, 밖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비슷한 손짓은 회의실 밖에도 흩어져 있습니다. 전화를 받기 전에 통화 녹음이 켜져 있는지 확인하는 손, 메신저 대화를 캡처해 따로 모아 두는 손, 방금 말로 들은 지시를 굳이 메일로 한 번 더 적어 보내며 참조란에 이름 하나를 더 넣는 손. 하나같이 조용하고, 하나같이 짧습니다. 조심하는 손과, 그 손이 들어서는 방 이 손짓들을 성격으로 정리하면 이야기는 금방 끝납니다. 좀 예민한 사람, 사람을 잘 못 믿는 사람. 그런데 녹음이라는 것이 원래 어디에 쓰이던 물건인지 옆에 놓아 보면 다른 것이 보입니다. 녹음은 대개 남겨 두고 싶은 것을 담습니다. 아이 목소리, 좋아했던 공연, 나중에 다시 듣고 싶은 강의. 담아 둔 것을 언젠가 꺼내 들으려고 켭니다. 그런데 문 앞에서 켜지는 녹음은 꺼내 들을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켜집니다. 담는 쪽이 아니라 대비하는 쪽입니다. 이스라엘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은 좋은 사회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의 마음씨보다 제도 쪽을 봅니다. 그가 말한 '품위 있는 사회'는 사람들이 서로 친절한 사회가 아니라,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입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모욕하지 않는 일과,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 일을 그는 따로 떼어 둡니다. 앞의 것은 각자의 몫이고,...

칭찬처럼 들린 세 개의 동사

회식이 한 시간쯤 지나 잔이 몇 번 오간 뒤였습니다.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들더니 웃으며 말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참 좋아, 고르기 쉽고 다루기 쉽고 자르기 쉬워서. 테이블에 웃음이 한 바퀴 돌고 잔이 부딪힙니다. 분위기는 조금도 어색해지지 않습니다. 방금 오간 말이 칭찬이었는지 아니었는지 되짚어 보는 사람도 없습니다. 말한 쪽에 나쁜 뜻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술자리에서 흔히 나오는, 자조가 반쯤 섞인 세태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웃은 쪽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웃지 않으면 그 말을 문제 삼는 사람이 되어 버리니, 그 웃음은 동의보다 예의 쪽에 가깝습니다. 비슷한 문장은 회식 자리 밖에도 굴러다닙니다. 누가 그만둔다는 소식에 요즘은 사람 금방 구해진다는 답이 따라붙는 자리, 새로 온 사람을 두고 손이 안 가서 편하다고 말하는 자리 같은 것들 말입니다. 어느 쪽이든 목소리는 가볍고,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이야기는 곧 다음 화제로 넘어갑니다. 세 개의 동사가 원래 있던 자리 고르다, 다루다, 자르다. 이 세 낱말을 한 줄에 놓고 보면 어딘가 익숙합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고르고, 연장을 다루고, 쓸모가 다한 것을 잘라 냅니다. 사람에게 붙기 훨씬 전부터 쓰이던 말들이고, 원래 붙던 자리는 사람 쪽이 아니었습니다. 칸트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두고 원칙 하나를 남겼습니다. 사람을 한낱 수단으로만 다뤄서는 안 되고, 언제나 목적으로도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말처럼 들리지만 뜻은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쓸모로만 셈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저 사람이 무엇에 도움이 되는지 따지기 전에, 그 사람 자체가 이미 셈 안에 들어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수단으로 삼는 일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은 서로 일을 맡기고 도움을 주고받으며 삽니다. 걸리는 것은 '수단으로만'입니다. 그 원칙을 옆에 놓고 아까의 세 마디를 다시 들여다보면, 그 문장에 무엇이 없는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세 마디는 전부 그 사람을...

인사는 오갔는데, 누구에게서 왔는지는

건물 현관에서 마침 아는 얼굴과 마주쳤습니다. 며칠 타이밍을 놓치고 지나쳤던 참이라, 이번에는 큰맘 먹고 먼저 소리를 냈습니다. 안녕하세요, 하고요. 그런데 그분의 눈이 제 얼굴에 잠깐 머무는가 싶더니 제 어깨 너머로 옮겨 갑니다. 뒤에 서 있던 사람에게요. 반가운 목소리의 답례가 그쪽으로 갑니다. 그 몇 초 동안 저는 손을 어디에 둘지 몰랐습니다. 못 들으셨나 싶어 한 번 더 소리를 낼까 하다가, 그러면 더 이상해질 것 같아 그냥 걸음을 옮겼습니다. 크게 기분 상할 일도 아니고, 종일 담아 둘 일도 아닙니다. 다만 자리에 앉고 나서도 뻘쭘한 기분이 조금 오래 남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도 비슷한 몇 초가 지나갑니다. 여럿이 함께 탄 자리에서 목례를 하면, 상대는 저를 지나 안쪽에 선 분과 인사를 주고받습니다. 겪어 보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장면은 대개 이름 붙일 것도 없이 지나갑니다. 인사는 한 번이 아니라 왕복입니다 인사를 소리 두 번이 오간 일로 보면, 이 장면에는 빠진 것이 없습니다. 인사가 있었고 답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반 박자를 천천히 늘려 놓고 보면, 인사에서 실제로 오가는 것은 소리가 아닙니다. 제가 건넨 말에 상대가 답을 할 때, 그 답에는 '당신이 저를 불렀군요'라는 확인이 함께 실려 돌아옵니다. 그 확인이 도착해야 인사 한 번이 닫힙니다. 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사람이 사람으로 서는 그 일을 '인정(Anerkennung)'이라고 불렀습니다. 말은 딱딱하지만 뜻은 단순합니다. 내가 한 일과 내가 건넨 것이 '나에게서 왔다'고 되돌아올 때, 사람은 비로소 한 사람으로 선다는 생각입니다. 되돌아오지 않으면 그 말은 허공에 흩어지는 게 아니라, 어디론가 가긴 갔는데 나에게서 출발했다는 사실만 떨어져 나갑니다. 그 눈으로 현관 앞의 몇 초를 다시 놓아 보면, 없었던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소리는 두 번 다 났고, 표정도 밝았습니다. 다만 그 답이 되돌아온 곳이 처음 소리를 낸 사람 쪽은 아니...

'스스로'라는 말이 이미 셈해 둔 것

햄버거 하나 먹으려고 매장 문을 열면, 사람보다 화면이 먼저 앞에 섭니다. 첫 장부터 누를 것이 촘촘히 펼쳐집니다. 신메뉴 안내가 한 번 지나가고, 매장에서 드실지 가져가실지를 묻고, 사이드는 무엇으로 바꿀지를 묻습니다. 그러는 사이 뒤로는 줄이 한 사람씩 늘어납니다.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 잠깐 멈춰 서면, 그 몇 초가 유난히 길어집니다. 기다리는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먼저 오고, 손끝은 그만큼 더 굳습니다. 결국 아무것도 시키지 못한 채 문을 나섰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한 번쯤 들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병원 로비의 무인 접수기 앞에서도, 역 대합실의 발매기 앞에서도 비슷한 몇 초가 지나갑니다. 그리고 이런 장면은 대개 '요즘 세상이 그렇지' 한마디로 정리되고 넘어갑니다. 허락과 해낼 수 있음 주문 화면 맨 위에는 대개 '터치하여 시작하세요' 같은 안내가 떠 있습니다. 누구나 스스로 고르고, 스스로 담고, 스스로 결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문장만 보면 막아 놓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은 자유를 조금 다른 자리에서 보았습니다. 무언가를 해도 된다고 허락되어 있는 것과, 어떤 사람이 그것을 실제로 해낼 수 있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문이 열려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아직 아무것도 말해지지 않습니다. 그 문턱을 넘을 수 있는지가 함께 물어질 때 비로소 자유라고 부를 만한 것이 됩니다.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곧 자유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눈으로 화면 위의 문장을 다시 읽으면, 문장 뒤에 조용히 붙어 있는 조건들이 보입니다. 화면이 어떤 순서로 넘어갈지 짐작하는 눈. 정해진 시간 안에 하나를 고르는 손. 그리고 뒤에 늘어선 줄 앞에서 서두르지 않을 여유. 화면은 이 조건들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요구하지 않는다는 건 없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갖춰져 있다고 셈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 셈이 빗나간 사람에게는 무엇이 남을까요. 예전에는 모르면 물어볼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부름 안에 이름이 없을 때

저녁 여덟 시, 홀이 가장 붐비는 시간입니다. 카운터 안쪽에 서 있으면 손님보다 목소리가 먼저 도착합니다. "야! 알바!" 뒤이어 오는 말은 두 마디뿐입니다. "소주." 그리고 잠시 뒤 "계산." 거친 말은 아닙니다. 욕이 섞인 것도, 목소리를 높인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군더더기 하나 없이 필요한 만큼만 말한 문장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서 본 사람들은 그 몇 초가 이상하게 오래 남는다고 말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하기에는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기에는 무언가 남습니다. 편의점 계산대에서도, 주유소에서도, 문 앞에 선 배달 기사에게도 비슷한 부름이 오갑니다. "여기요"가 붙으면 그나마 나은 편이고, 바쁠 때는 그것마저 생략됩니다. 세 마디가 가리킨 것들 오간 말을 종이에 적어 보면 세 덩어리입니다. 호명 하나, 물건 하나, 절차 하나. "소주"는 진열대 위의 물건을 가리킵니다. "계산"은 지금 처리되어야 할 순서를 가리킵니다. "알바"는 그 물건과 순서를 처리하는 기능을 가리킵니다. 세 마디 모두 무언가를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습니다. 다만 셋 중 어느 것도 카운터 안쪽에 서 있는 사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이 오래 붙들고 있던 말이 '존중'입니다. 그가 말하는 존중은 예절 교육을 잘 받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존중은 공기처럼 떠다니다 저절로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먼저 건네야 비로소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건네지 않으면 생기지 않습니다. 나쁜 마음이 있어야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건네지 않으면 그냥 없는 채로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장면에서 빠져 있던 것은 예의범절이 아닌 듯합니다. 예의범절이라고 하면 이야기가 곧장 사람의 됨됨이로 좁아지고, 부른 사람 한 명을 나무라는 데서 끝납니다. 그보다 먼저 눈에 걸리는 건 다른 쪽입니...

종이에서 눈을 드는 데 걸리는 시간

진료실 앞 의자에 한 시간쯤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대기실에 앉아 있는 동안에는 물어볼 것을 속으로 몇 가지 꼽아 두게 됩니다. 언제부터 이랬는지, 밤에 자다 깨는 것도 이것과 관련이 있는지. 이름이 불리고 문이 열립니다. 선생님은 화면에 뜬 결과지를 한참 들여다봅니다. 숫자는 빠짐없이 읽히고, 곧 "이상 없네요" 한마디가 나옵니다. 처방이 나가고 문이 닫힙니다. 꼽아 두었던 것들은 그대로 남아 함께 밖으로 나옵니다. 복도를 몇 걸음 걷다가 "아, 그걸 물어본다는 게" 하고 떠오르는 순간이 있습니다. 다시 들어가기에는 이미 다음 이름이 불린 뒤입니다. 종이는 다 읽혔는데 이 장면에서 시선이 어디에 머물렀는지만 따라가 보겠습니다. 그 몇 분 동안 가장 오래 머문 눈길은 사람이 아니라 결과지 위에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결과지를 읽은 일이 잘못은 아닙니다. 오히려 꼼꼼히 읽혔습니다. 읽어야 할 것은 다 읽혔는데, 그 종이가 애초에 담을 수 없는 것들만 밖에 남았습니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사람이 무언가를 대하는 방식을 두 갈래로 나눠 불렀습니다. '나-너'와 '나-그것'입니다. 앞에 있는 것을 읽고 확인하고 처리하면 끝나는 하나의 대상으로 대하는가, 아니면 나를 마주 보고 있는 한 사람으로 대하는가의 차이입니다. 결과지는 '그것'입니다. 수치는 읽으면 되고, 읽고 나면 할 일이 정해집니다. 종이를 '그것'으로 대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그 종이가 끝내 담지 못하는 한 줄이 있습니다. '오늘 여기 앉은 이 사람이 무엇을 묻고 싶어서 한 시간을 기다렸는가.' 이 줄은 어떤 검사로도 나오지 않습니다. 종이에서 눈을 들어 마주 볼 때에만 열립니다. 부버의 말로 옮기면, 상대를 '너'로 대하는 그 한 번의 순간에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마주봄은 왜 자주 빠질까요. 누군가의 무심함으로 돌리면 이야기가 간단해지지만, 그렇게 보면 ...

매일 사라지도록 되어 있는 일

저녁상이 차려집니다. 국에서는 아직 김이 오르고, 접시는 어제와 조금 다른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밥을 다 먹고 나면 그릇이 개수대로 옮겨지고, 물소리가 잠깐 나다가 그칩니다. 잠시 뒤 부엌은 아침에 보았던 모습으로 돌아가 있습니다. 방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자국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어느 집에서는 이런 말이 오갔다고 합니다. 하루 세 번 상을 차리고 그 사이사이 닦고 개어 두는 일에 대해 한마디를 건넸더니, 돌아온 대답이 "원래 하는 건데 뭘"이었다고요. 모질게 하려던 말은 아니었을 겁니다. 다만 그 말이 나오면 이야기는 거기서 접히고, 곧 다음 끼니 준비가 시작됩니다. 같은 대화가 하루에 몇 번이고 지나갑니다. 이런 장면이 유별난 집에만 있지도 않습니다. 며칠 앓고 일어났는데 집 안이 그대로 굴러가고 있던 아침, 늦게 들어와도 식탁에 덮여 있던 그릇. 되어 있는 것은 매일 만나는데, 그것이 누구의 손을 지나왔는지는 좀처럼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원래'라는 두 글자가 앉아 있는 자리 "원래 하는 건데 뭘"이라는 문장을 천천히 읽어 보면 빠진 것이 하나 눈에 들어옵니다.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가 무엇을 했다는 말이 들어설 자리에 '원래'라는 두 글자가 대신 들어앉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일은 사람이 한 일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런 상태였던 것처럼 들립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주인과 노예' 대목에서, 시키는 쪽이 아니라 실제로 손을 대는 쪽이 오히려 자기를 세우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어려운 말 같지만 이유는 단순합니다. 손을 댄 것은 세상에 남고, 남은 것은 만든 사람에게 되돌아와 '이건 내가 한 것'이라고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깎아 놓은 나무, 지어 놓은 집처럼요. 그런데 살림은 남지 않는 쪽으로 되어 있는 일입니다. 차린 밥은 먹혀서 없어지고, 닦은 바닥은 곧 다시 밟히고, 갠 옷은 다시 입혀져 흐트러집니다. 결과가 사라져야 제대로...

문 안쪽에서는 문이 보이지 않습니다

보조견 한 마리와 함께 매장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인사보다 먼저 "개는 안 됩니다"라는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실랑이는 없었습니다. 목소리가 커지지도 않았고, 설명이 오래 이어지지도 않았습니다. 들어서던 걸음이 방향만 바꾸어, 그대로 문 밖으로 나갔을 뿐입니다. 매장은 잠깐 어색했다가 곧 평소의 소리로 돌아갔을 겁니다. 계산대 벨 소리, 봉투 부스럭거리는 소리. 돌아선 쪽의 하루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저녁 찬거리를 다른 데서 구했는지, 그냥 집으로 향했는지. 그런 일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으니까요. 비슷한 장면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습니다. 들어가려다 돌아선 걸음, 물어보려다 삼킨 말. 큰 사건이 아니라서 뉴스가 되지도 않고, 사과를 받게 되지도 않는 장면들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잠깐 다른 자리에 서서 바라보고 싶습니다. 그날 그 입구에 서 있던 것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요. 보조견은 몇 년을 배웁니다. 수많은 훈련과 여러 번의 시험을 통과한 뒤에야 한 사람의 눈과 발이 되어 거리로 나옵니다. 그러니 그날 문 앞에 서 있던 것은 '손님과 개'가 아니었습니다. 오래 준비되어 이미 완성되어 있던, 한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하루를 건너가는 방식 그 자체였습니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이런 장면을 '역량'이라는 눈으로 다시 봅니다. 말은 낯설지만 뜻은 평이합니다. 사람에게 어떤 능력이 있다는 것과, 그 능력을 실제로 펼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라는 겁니다. 걸을 수 있어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없다면, 고를 수 있어도 진열대 앞까지 갈 수 없다면, 그 능력은 아직 그 사람의 자유가 된 것이 아닙니다. 능력은 사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세상이 맞물리는 자리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시선입니다. 이 눈으로 보면 그날 모자랐던 쪽이 어디였는지가 조금 다르게 드러납니다. 돌아선 분에게는 모자란 것이 없었습니다. 걸을 수 있었고, 고를 수 있었고, 계산할 수 있었습니다. 비어 있던 것...

쉰 시간을 흠이 아니라 삶으로

재취업을 준비하며 면접을 보러 가면, 대화가 순조롭게 흐르다가도 한 대목에서 공기가 살짝 달라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력서 위 어느 몇 달, 아무 소속도 적혀 있지 않은 그 빈 줄에 시선이 닿을 때입니다. "이 기간에는 뭘 하셨어요?" 하는 물음이 던져지고, 그때부터는 준비해 온 답을 말하기보다 그 몇 달을 자꾸 설명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런 자리에 한 번쯤 앉아 보신 분이라면, 그 미묘한 온도 차를 아마 기억하실 겁니다. 비슷한 장면은 면접장 바깥에도 있습니다. 병으로 한동안 쉬었다 돌아온 사람이 오랜만에 마주친 동료에게 안부 대신 "그동안 왜 안 보였어?"를 먼저 듣기도 하고, 아이를 키우느라 일을 멈췄던 사람이 모임에 나갔다가 "그 긴 시간 아깝지 않았어요?"라는 말에 머쓱해지기도 합니다. 누구도 언성을 높이지 않았고, 모진 말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돌아 나오는 발걸음은 어쩐지 조금 무거워집니다. 모욕은 늘 목소리를 높이지 않습니다 이 장면을 잠깐 다른 각도에 놓고 보겠습니다. 먼저 눈에 걸리는 건, 그 몇 달을 대하는 질문이 거의 언제나 '왜'로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왜'에 마련된 정답의 자리는 사실상 하나뿐입니다. 남들이 납득할 만한 사유를 대서, 비어 보이는 그 기간을 지워 내는 것. 아이를 돌봤든, 아팠든, 그저 다음 걸음을 고르느라 잠시 멈춰 섰든, 그 시간을 '한 사람이 어쨌든 살아 낸 시간'으로 그냥 적어 둘 칸은 그 질문 안에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은 좋은 사회를 재는 자를 조금 다른 데로 옮겨 보자고 했습니다. 흔히 우리는 얼마나 고르게 나눠 가졌는가로 사회의 됨됨이를 가늠하지만, 그는 '이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가'를 먼저 물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회를 '품위 있는 사회'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가 말한 '모욕'의 뜻...

이름이 아니면 채워지지 않는 자리

새로 들어간 일터에서, 손이 좀 느리다는 이유로 이름 대신 '1번' '2번'으로 불려 본 적 있으신지요. "어이, 2번!" 하는 소리에 어느새 고개부터 먼저 돌아갑니다. 처음에는 별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사람이 많은 현장에서 하나하나 이름을 외우기도 번거로우니, 그냥 부르기 편한 호칭인가 보다 하고 넘어갑니다. 그런데 이런 부름은 꼭 공사장이나 주방 같은 곳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콜센터에서 '상담원 몇 번'으로, 앱 화면 속 '기사님'이라는 이름 없는 이름으로, 병원 대기실에서 '3번 환자분'으로 불리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부르는 쪽에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불리는 쪽이 크게 상처받는 것도 아닙니다. 다들 그러려니 하고 하루가 지나갑니다. 번호는 채워져도, 이름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부르기 편함'을 조금만 더 따라가 보면, 묘한 지점이 하나 드러납니다. 번호에는 이름과 다른 성질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그 자리에 선 사람이 그만두면, 내일 다른 사람이 와서 똑같이 '1번'이 됩니다. 사람이 바뀌어도 번호는 그대로 남습니다. 그런데 이름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이 아니면 채워지지 않는, 세상에 딱 한 자리를 가리킵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사람을 대하는 두 가지 방식을 갈라서 보았습니다. 하나는 필요한 일을 시키기 위한 수단으로'만' 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으로도 바꿔 끼울 수 없는, 그 자체로 목적인 존재로 대하는 것입니다. 칸트는 물건에는 값이 매겨져 다른 것과 바꿀 수 있지만 사람에게는 값이 아니라 존엄이 있어서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도구로 쓰는 건 살면서 어쩔 수 없다 해도, 도구로'만'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 눈으로 다시 보면, 번호로만 불리는 그 자리에 비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그건 그 사람의 능력이나 참을성 같은 게...

이름 없이 떠다니는 생각들

회의가 한창 이어지던 중에 누군가 한 가지 의견을 냅니다. 방 안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끄덕여지고, 좋은 얘기네요, 하는 말도 몇 마디 붙습니다. 그런데 그 의견이 어쩐지 낯익습니다. 며칠 전 복도에서, 혹은 점심을 먹다가 지나가듯 먼저 꺼냈던 바로 그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그거 제가 먼저 했던 생각인데요' 한마디가 목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조용히 가라앉습니다. 삼킨 이유가 조금 묘합니다. 겁이 나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한마디를 꺼내는 순간, 왠지 제가 쪼잔한 사람이 될 것 같아서였습니다. 이런 순간, 꼭 회의실이 아니어도 한 번쯤 겪어 보셨을지 모릅니다. 가족 단톡방에 흘리듯 올린 아이디어가 며칠 뒤 다른 사람 입에서 근사한 계획이 되어 돌아오고, 오래 준비한 제안이 여러 손을 거치는 사이 처음 낸 사람의 이름만 슬그머니 지워지는 자리 말입니다. 대답이 아니라,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눈에 걸리는 건, 분명 좋은 생각을 냈는데 정작 그걸 '내 것'이라 밝히는 쪽이 옹졸한 사람이 된다는 점입니다. 왜 이런 뒤집힘이 생기는 걸까요.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인정이라는 것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았습니다. 내가 한 일은 나 혼자 마음속으로 알고 있다고 해서 내 것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말을 주고받는 자리에서 누군가 '그건 저 사람이 낸 것'이라고 짚어 줄 때, 비로소 그 일이 내 것으로 선다고 보았습니다. 인정은 혼자 품고 있는 감정이 아니라, 여럿이 주고받는 자리에서 생기는 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눈으로 회의실을 보면, 비어 있는 것이 그 사람의 용기가 아니라는 게 드러납니다. 낸 사람과 낸 것을, 아무 다툼 없이 한 번 이어 줄 확인. 그 확인이 놓일 칸이 애초에 없는 겁니다. 안건을 올리고 검토하고 결정하는 순서는 꽤 촘촘히 갖춰져 있는데, '이 생각은 처음 누구에게서 나왔나'를 가볍게 적어 둘 칸만은 어느 순서에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이디어는 주인 없이 떠다니다 ...

제안이 끝나기 전에 돌아온 대답

회의가 한창일 때, 누군가 조심스럽게 손을 듭니다. 이 부분은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답이 돌아옵니다. 그냥 원래 하던 대로 합시다. 반 박자 빠른 그 대답을, 아마 한 번쯤 들어 보셨을 겁니다. 큰 언쟁이 벌어진 것도 아니고, 누가 언성을 높인 것도 아닙니다. 회의는 그대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갑니다. 꼭 회의실 안에서만 있는 일도 아닙니다. 오래 굴러온 가게의 주방에서 새로 온 사람이 순서를 한번 바꿔 보자고 하면, 늘 하던 대로 하라는 말이 먼저 옵니다. 몇 년째 같은 양식을 쓰는 부서에서 누군가 서식을 손보자고 하면, 쓰던 걸 쓰자는 답이 돌아옵니다. 어디서도 규칙을 어긴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꺼내진 방법 하나가, 놓이자마자 조용히 접힙니다. 대답이 제안보다 빨랐다는 것 이 장면에서 먼저 눈에 걸리는 건 대답의 내용이 아니라 속도입니다. 대답이 제안보다 빨랐다는 건, 그 제안이 끝까지 들린 적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하자는 말인지 확인되기도 전에 자리는 이미 닫혀 있었던 셈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갈리는 건 좋은 방법이냐 나쁜 방법이냐가 아닙니다. 그 방법이 좋은지 나쁜지 알아볼 시간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으니까요.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은 사람에게 중요한 건 무엇을 할 줄 아느냐만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 능력을 실제로 써 볼 기회가 열려 있느냐, 거기까지가 한 사람의 자유라는 겁니다. 할 줄 아는 것과, 그것을 해 봐도 되는 자리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품고 있어도 그것을 꺼내 볼 통로가 막혀 있다면, 그 능력은 있으나 없으나 크게 다르지 않게 됩니다. 센이 보기에 자유란 마음속에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바깥에서 펼쳐질 자리가 있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이 눈으로 회의실을 다시 보면 비어 있는 것이 하나 드러납니다. 그 방에는 결정하는 절차가 꽤 갖춰져 있습니다. 안건을 올리는 법, 검토하는 법, 반려하고 다시 올리는 법까지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검증되지 않은 방법...